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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352
한자 級川驛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역리
시대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곽호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준공 시기/일시 고려시대 - 급천역 설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6년 1월연표보기 - 급천역 폐지
최초 설립지 급천역 -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역리 지도보기

[정의]

고려와 조선시대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지역에 설치되었던 역.

[개설]

급천역(汲泉驛)덕산현 대조지면[현재 예산군 삽교읍 역리]에 있었다. 덕산, 홍주, 해미, 당진, 예산, 대흥, 청양 등의 지역으로 연결되는 곳에 있었으며, 위의 지역을 여행하는 이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다. 급천역은 관할 역도가 금정도-시흥도-금정도로 바뀌었다.

[건립 경위]

역(驛)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공문의 전달과 사신 및 관리의 여행에 마필(馬匹)을 제공하고 변방의 군정을 보고하던 곳이었으며,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원(院)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역원(驛院)이라 통칭되었다. 역도는 도로의 상태와 중요도 및 산천의 거리에 따라 여러 개의 역을 묶어 찰방(察訪)[종6품]이나 역승(驛丞)[종9품]의 지휘 감독 아래 순행·고찰하면서 역을 관리하는 체계이다. 전국의 각 역에는 찰방, 역승의 관장 하에 역장(驛長)·역리(驛吏)·역졸(驛卒) 등을 두어 역정(驛政)의 관리와 공역(公役)을 맡게 하였다.

[변천]

급천역은 『고려사』 권82, 병지(兵志) 참역(站驛)조에 따르면 고려시대 전국 22개 역도(驛道) 중 하나인 충청주도(忠淸州道)에서 관할하는 34개 역 가운데 한 곳이었다. 당시의 행정구역으로는 이산현(伊山縣)에 속해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설치되었던 급천역은 조선 세종 때에는 금정도(金井道)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세조 때에는 시흥도(時興道)에 소속된 8역의 한 곳으로 역승의 관할하에 있었다. 숙종 연간에 간행된 『전록통고(典錄通考)』에 급천역시흥도 소속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757년(영조 33)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시흥도에 소속되었던 급천역금정도 소속으로 기록되어 있다. 1700년을 지나면서 시흥도가 폐지되면서 시흥도 소속의 8역이 금정도 소속의 9역과 함께 금정도 찰방의 관할로 통합된 것이다.

당시에 급천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대조지면(大鳥旨面) 역상리(驛上里), 역중리(驛中里), 역하리(驛下里)의 한 곳이다. 이 세 마을 중 인구가 가장 많은 역중리에 급천역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급천역은 근대화 과정에서 정치·사회제도가 변화하고, 교통이 발달하면서 폐지되었다. 1896년(건양 1) 1월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급천역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본래 덕산군 대조지면에 있었던 급천역역말, 역동으로 불리다가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예산군 삽교읍 역리로 편제되었다.

[구성]

『여지도서』 충청도 덕산현 역원조에 “급천역이 현[덕산] 동쪽 10리에 있으며 금정도 소속이다. 상등마 2필, 중등마 4필, 하등마 4필이 있으며, 역노 38명, 비 18명[汲泉驛 在縣東十里 金井屬 上等馬二匹 中等馬四匹 下等馬四匹 驛奴三十八口 婢十八口]”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황]

급천역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지방의 공무수행 관리에 역마 및 숙박 편의 제공과 중앙과 지방의 연락 업무를 목적으로 현재 예산군 삽교읍 역리에 설치되었던 교통·통신제도이다. 국가경영상 중요한 기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품계가 높지 않은 찰방과 역승의 관할 하에 있었고 역제(驛制) 운영상 폐단이 많아지면서 편제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역’ 자가 ‘역말’, ‘역동’ 등의 지역 명칭으로 사용되는 곳이 그 기능을 하였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을 뿐 그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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