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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학파의 계승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354
한자 星湖學派-繼承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예산 지역을 비롯한 내포 지방으로 계승된 실학자 성호 이익의 경세치용 학풍.

[개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성리학의 한계성을 극복하려는 일군의 학자가 등장하는데 이들의 학문을 실학(實學)이라 부른다. 실학자들 중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서적을 접하고 개방적인 학풍의 경세치용(經世致用) 실학사상을 정립한 인물이다. 이익의 일가와 후손 일부가 지금의 충청남도 서부 지역인 덕산[지금의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 세거함에 따라 성호학파의 계승이 덕산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여주이씨의 덕산 입향]

성호 이익의 가문은 여주이씨로, 경기도 안산 첨성리에 세거하여 왔다. 이익의 아버지 이하진(李夏鎭)과 작은아버지 이명진(李明鎭)이 예산 지역의 재지사족이었던 용인이씨 가문과 혼인하면서 처가로부터 재산을 상속받고 충청도 덕산과의 인연이 맺어졌다.

이하진에게는 5남 4녀의 자제가 있었는데 이 중 초취 용인이씨와의 사이에 이해(李瀣), 이잠(李潛), 이서(李漵) 3형제를 두었고, 후취 안동권씨와의 사이에 이침(李沉), 이익 두형제를 두었다. 성호의 동복형이었던 이침은 아들이 없던 숙부 이명진에게 출계(出繼)하였고, 그 슬하에 이광휴(李廣休), 이용휴(李用休), 이병휴(李秉休) 등 세 아들을 두었다. 그런데 성호의 이복형 이해와 이잠에게 소생이 없자, 이침의 아들 이광휴와 이병휴가 각각 출계하였다. 이광휴와 이용휴의 아들이 각각 이삼환(李森煥)과 이가환(李家煥)이며, 모두 덕산에 거주하였다.

성호의 조카들은 덕산 장천리에 거주하면서 삽교천을 따라 아산만을 통해 뱃길로 경기도 안산으로 가 성호로부터 글을 배웠고, 성호의 학풍을 따랐다. 그리하여 덕산 장천리는 성호의 실학을 계승한 중심지가 되었다.

[성호가학을 계승한 인물]

성호 이익의 집안에서 성호로부터 실학을 전수받았던 인물은 여럿인데 출계 문제로 가계는 복잡하지만 혈연적으로 모두가 성호의 동복형인 이침의 자손들이다. 이들은 조금씩 경향을 달리하며 성호 가학을 발전시켰다.

다산 정약용은 성호 이익으로부터 학문을 계승한 여주이씨 인물들에 대해 “정산 이병휴는 역경(易經)과 삼례(三禮), 만경 이맹휴는 경제와 실용, 혜환 이용휴는 문자학(文字學), 장천 이철환은 박물학(博物學), 목재 이삼환은 예학(禮學), 섬촌 이구환은 경제실용지학(經濟實用之學)을 계승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중 이용휴[1708~1782]는 덕산에서 나고 자라며 재야학자로서 문학, 음운학, 병학(兵學), 농학에 두루 통달하였다. 정약용은 그를 일컬어 ‘문명(文名)이 일세의 으뜸’ 이라 칭하며 과거를 보지 않은 선비에 불과했지만, 그를 따르는 이들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다. 이용휴의 실학은 아들 이가환과 외손 이승훈(李承薰), 이학규(李學逵)에게 전승되었다.

이가환[1742~1801]은 남인 실학파의 주요 인물로, 채제공(蔡濟恭)의 뒤를 이어 청남(淸南)계열의 지도자로 촉망받았다. 학문적으로는 정약용, 이벽(李檗), 권철신(權哲身) 등 초기 천주교 신자들과 교유하였고, 서학 입문서를 제자들에게 전교하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이승훈, 권철신 등과 함께 순교하였다.

이용휴의 동생 이병휴[1710~1776]는 숙부인 이잠에게 글을 배우다 이잠의 사후에는 이익의 곁에 머물며 수학하였다. 이병휴는 이익의 학문을 가장 깊게 전수한 인물로 경학(經學)과 박물학에 관심을 갖고 동식물에 대한 연구에 몰입했다. 안정복과 가까이 교유하면서 『동사강목(東史綱目)』의 편찬에도 도움을 주었다. 이병휴의 문하에서 권철신·권일신(權日身) 등이 배출되었다. 권철신과 권일신 등은 양명학과 천주교 등 신사조에 조예가 깊었다.

이병휴는 아들이 없어 큰형의 아들인 이삼환을 양자로 들였다. 이삼환[1729~1813]은 이병휴의 경학 연구를 계승하면서 덕산 지역 여주이씨 집안의 원로로서 성호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삼환은 다산 정약용 등과 학문을 교류하기도 했지만 서학인 천주교는 배척하는 입장이었다. 이삼환은 온건한 개혁을 원하는 실학자였다.

[충청 지역으로 확산되는 성호학풍]

지금의 충청남도 지역은 조선 후기 서인 노론계의 터전이었고, 주로 기호남인 계열에 의해 발전된 실학이 덕산을 기반으로 확산되었다. 덕산의 여주이씨가를 비롯해 예산의 한산이씨 이산해가, 청양의 채팽윤이, 공주의 안동권씨 권이진이 등이 대표적인 실학 학풍을 계승한 집안이다. 이들은 학연으로 연결되었으면서 서로 혼인을 맺어 성호학이 덕산으로부터 충청 내륙지방까지 퍼지게 되었다.

이 중 덕산과 가까운 예산에 세거했던 한산이씨는 여주이씨 집안이 서울에서 활동하던 1600년대부터 이미 혼인을 통해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훗날 한산이씨 집안의 수당 이남규(李南珪)[1855~1907]는 이익에서 안정복, 황덕길, 허전으로 이어지는 성호학통을 계승하였고, 이삼환의 묘지명을 짓기도 하였다.

공주 세거 안동권씨는 권이진의 손자 권세억(權世檍)이 이익의 손자 이구환을 사위로 삼았고, 이가환의 딸을 손부로 맞이하며 실학정신을 교류하였다. 온양 배방의 권대후 가문, 청양의 평강채씨 모두 같은 남인이란 당색을 갖고 혼인으로 더욱 긴밀히 엮여 성호 가학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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