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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368
한자 開港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문경호

[정의]

1864년 이후 1910년 일제 강점 이전까지 충청남도 예산군의 역사.

[개설]

개항기 동안 서원 철폐, 천주교 박해, 병인양요, 오페르트 도굴사건, 신미양요 등 많은 사건들이 예산 지역과 관련되어 일어났다. 또한, 개항 이후 서양 문물과 서양 상인들이 밀려들어와 농민들의 삶이 더욱 궁핍해지자 동학농민운동이나 항조운동(抗租運動) 등이 전개되었으며, 1905년을 전후로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항쟁 등이 일어났다. 1914년에는 군면 폐합으로 지금의 예산군 행정구역이 확립되었다.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예산]

철종(哲宗)[1831~1863] 사후 고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대원군 집권 시기 10년 동안 서원 철폐, 천주교 박해, 병인양요, 오페르트 도굴사건, 신미양요 등 많은 사건들이 예산 지역과 관련되어 일어났다. 예산의 덕잠서원, 회암서원, 우천사, 집성사 등과 같은 서원과 사우가 모두 훼철되었다. 병인박해 때에는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홍주, 해미, 예산, 대흥의 관아에 끌려가서 순교하였다. 특히,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의 도굴을 시도한 사건에 덕산 지역 천주교 신자들이 길 안내를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화되었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의 피해가 예산 지역에 직접적으로 미치지는 않았지만, 서해안에 간혹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양선으로 인해 민심은 어수선해졌다.

[강화도조약의 체결과 예산]

1876년(고종 13)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강화도 조약 이후 예산 일대에도 예외 없이 개화의 물결이 들이닥쳤다.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이 조선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면서 청과 일본의 상인들이 내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청 상인들은 불평등조약의 특권을 토대로 고덕구만포와 아산 선장포구 등을 통해 예산 일대로 들어왔다. 1894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일본 상인의 활동이 점차 확대되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청일전쟁 등이 연이어 일어나고 외국 물품의 유입과 외국 상인들의 내륙 진출이 가능해지면서 예산 지역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예산은 다른 지역에 비해 서울과 가깝고, 육로 및 수로가 모두 발달하여 상업 발달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예산에는 조선 왕실의 재정을 조달했던 궁방전이 널리 분포되어 있어 농민들의 항조운동도 연이어 일어났다. 그로 인해 내장원에서 예산군수와 전조를 징수하는 수세관에게 ‘도조를 엄히 징수하라’는 훈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동학농민운동과 예산]

개항 후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경제적 침탈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곡물을 수출하고 면직물을 수입하는 무역 구조가 자리 잡았다. 그 결과 쌀값이 오르고 가내수공업은 붕괴하는 등 전통적인 경제질서가 붕괴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1차 봉기 때는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남접이 봉기를 주도했으나 일본의 경복궁 점령을 계기로 일어난 2차 봉기 때에는 남접과 북접이 연합하여 항일 구국의 전선을 폈다. 당시 예산의 대표로 북접에서 활동한 인물은 박인호(朴寅浩)와 박덕칠이었다. 특히 박덕칠은 예포의 대접주였는데, 예포란 예산의 동학 조직을 일컫는 말이었다. 당시 예포 관내의 교안에 기재된 동학신도의 수는 5,000호나 되고, 신도수는 1만 7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동학농민운동 실패 이후에도 농민군들의 활동은 지속되었다.

[의병항쟁, 애국계몽운동과 예산]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예산의 민족운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먼저,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노한 유학자들은 을미의병의 뒤를 이어 을사의병을 일으켰다. 예산의 남규진과 광시의 박창로, 대술의 이남규 등은 1895년 을미의병과 1905년 이후 을사의병을 일으키거나 적극 참여하여 일본의 침략에 맞섰다.

1880년대 초부터 시작된 개화정책의 영향으로 예산 지역에서도 신문학 보급 운동이 전개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시기에는 기호흥학회와 관련있는 여러 사립학교들이 건립되었는데, 그중 가장 먼저 세워진 학교가 전 진사 김동욱이 1905년 덕산에 세운 명신학교(明新學校)였다. 그외에도 예산의 배영학교(培英學校)[군내학교(郡內學校)로 개칭], 대흥의 흥남학교(興南學校), 예산의 동일연성학교 등이 세워졌다. 한편,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는 예산 지역 주민들도 적극 참여하여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에 의연금을 냈다.

[행정구역의 개편과 예산]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시행된 13도제의 도입으로 충청도가 남도와 북도로 분리되면서 예산군은 충청남도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1906년에는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월경지(越境地)가 정리되었다. 이로 인해 천안 월경지 신종면이 없어지고 예산군은 10개의 면으로 구성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는 군면 폐합으로 예산군, 대흥군, 덕산군이 통합되어 현재의 예산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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