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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홍주의병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372
한자 丙午洪州義兵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6년 3월연표보기 - 병오홍주의병 봉기
종결 시기/일시 1906년 5월연표보기 - 병오홍주의병 홍주성전투
발단 시기/일시 1906년 3월 15일 - 병오홍주의병 을사늑약 게기로 거병
발생|시작 장소 병오홍주의병 봉기지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지도보기
종결 장소 홍주성 -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성격 의병운동
관련 인물/단체 민종식|홍주의병

[정의]

1906년 3월 예산 광시를 비롯한 홍주 일대의 사민들이 봉기를 하여 홍주성전투를 치른 의병 활동.

[개설]

1906년(광무 10, 병오년) 3월 민종식(閔宗植)[1861~1917] 등이 의병을 편성하여 예산의 광시에서 봉기하였다. 병오홍주의병은 합천전투에서 패퇴한 뒤 부여의 지티에서 재기하여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병오홍주의병은 일본군의 공격으로 홍주성을 빼앗기고 많은 희생자를 낳았으나, 타 지역 의병봉기에 영향을 끼쳤으며 일제강점기 독립전쟁으로 계승된 점에서 의의가 크다.

[역사적 배경]

1895년 홍주의병을 봉기하였던 세력인 안병찬, 채광묵, 박창로, 이세영 등은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의병을 봉기하였다. 이들은 충청도 정산에 거주하고 있는 전참판 민종식을 찾아가 총수의 책임을 맡아 달라고 청하였다. 을미사변 후 관직을 버리고 정산의 천장리에서 은거 중이던 민종식은 이를 기꺼이 수락하였으며 박토10여 두락을 팔아 5만 냥을 군자금으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민종식은 대장에 추대되어 의진의 근거지를 천장리로 삼고 항쟁에 돌입하였다. 주요 인물로는 안병찬, 채광묵, 박창로, 이용규, 홍순대, 박윤식, 정재호, 이만직, 성재한 등을 들 수 있다. 의진은 격문과 각국의 공사에게 보내는 청원문 그리고 각지에 의병 참여를 호소하는 통문을 보냈다.

[경과]

민종식은 의진을 편성하고 광수장터[현 예산군 광시면]에서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리고, 이튿날 홍주성을 공격하였으나 관군의 저항에 부딪쳤다. 다음날 청양의 합천으로 진을 옮겼으나 공주에서 파견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합천전투에서 패퇴한 민종식은 각지를 잠행하다가 이용규가 초모한 의병을 중심으로 부여의 지티에서 의병을 재기하였다. 병오홍주의병은 남포전투를 승리한 후 5월 19일 홍주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5월 20일부터 공주의 고문부 경찰과 수원의 일본 헌병대가 파견되어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병오홍주의병은 굳건한 성벽을 이용하여 이들의 공격을 물리쳤다. 몇 차례의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공격에도 전세가 의병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보병 제60연대의 대대장 다나카[田中] 소좌 지휘하에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1개 소대가 합세하여 5월 30일 홍주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다나카 소좌의 지시에 따라 31일 오전 2시 반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3시경에 기마병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시켰다. 이를 신호로 하여 일본 보병과 헌병대, 경찰대가 기관포를 쏘며 성문 안으로 진입하였다. 병오홍주의병 측에서는 성루에서 대포를 쏘면서 대항하였으나 북문도 폭파되었다. 병오홍주의병은 치열한 시가전을 감행하면서 응전하였으나 결국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결과]

홍주성전투에서 참모장 채광묵 부자와 운량관 성재평을 비롯하여 전태진, 서기환, 전경호, 이재형 등 300여 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8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그중에서 유병장 유준근을 비롯하여 이식, 안항식 등 9명은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민종식 등은 이남규의 집에서 재기를 도모하여 11월 20일 예산을 공격하여 활동의 근거지로 삼기로 결정하고 민종식을 다시 대장에 추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에 일본헌병과 지방병, 그리고 일진회원의 포위 습격을 당하여 곽한일, 박윤식, 이석락 등이 체포되었다. 이남규, 이충구 부자도 함께 체포되어 온갖 악형을 당하였다. 민종식은 체포를 면하였으나 11월 20일 공주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박창로 등 체포를 면한 의병들은 청양의 오서산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계속 전개하였다. 우군관 홍순대는 1906년 11월 초 부여군 은산면에서 80여 명을 규합하여 의병을 재기하였다.

이와 같은 의병의 재기 움직임에 일제는 불안을 느끼고 중요 인물들에 대한 감시와 학대를 강화하였다. 1907년 9월에는 일본기마대가 이남규 부자를 체포해 가던 중 온양의 평촌[현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냇가에서 이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1월에는 김복한이 거의를 밀의하였다고 하여 구속하여 악형을 가하였다.

[의의와 평가]

병오홍주의병은 강렬한 반침략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타 지역 의병봉기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1910년대 독립전쟁과 나아가 3·1운동으로까지 인적·사상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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