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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학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401
한자 夜學運動
이칭/별칭 문맹퇴치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문경호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예산 지역에서 민족 실력 양성을 위해 공립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개한 교육운동.

[개설]

일제의 통치방식이 3.1운동을 기점으로 문화통치 방식으로 전환되면서 교육열이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곳곳에서 실력양성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일제의 차별적인 식민지 교육정책과 사립학교 탄압으로 인해 교육시설이 부족하여 정규 교육을 받기 어려웠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의무교육제도가 시행되지 않아 가난한 농민들의 경우 교육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자녀를 학교에 입학시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어린이들과 성인들은 낮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야간에 모여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경과]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 발표 후 예산 지역에는 대흥보통학교를 시작으로 보통교육기관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1931년을 기준으로 예산 지역에 설립된 학교는 유치원 1개, 공립소학교 2개, 공립보통학교 10개, 공립농업학교 1개였다. 그러나 일제의 우민화 정책으로 교육기관이 턱없이 부족하였으며, 학비가 비싸서 농민들의 자녀가 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하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 취학 인원은 학령 아동의 1/5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일환으로 3.1운동 이후 미취학 아동을 위한 야학과 강습소가 전국 각지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제는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야학운동을 탄압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예산군 곳곳에서 야학이 운영되었다. 노동야학, 언문강습소 등을 비롯하여 대술면의 고성강습소, 대흥면의 계몽학원, 삽교의 영성학원, 예산감리회가 운영하는 성광학원 등 곳곳에 야학기관이 생겨났으며, 항일 운동가인 금홍의 주도로 야학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예산 지역의 많은 학생들이 배움의 기회를 얻었다.

[결과 및 의의]

일제강점기의 야학운동은 정규 교육이 어려운 학생과 성인들에게 문자 습득의 기회를 제공하여 문맹 퇴치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민중 계몽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한글과 한국사 보급을 통해 민족의식을 형성시킴으로써 국권회복운동과 여성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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