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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558
한자 德岑書院遺墟碑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42년연표보기 - 덕잠서원 유허비 건립
보수|복원 시기/일시 1984년연표보기 - 덕잠서원 유허비 이전 및 개축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488년 - 김구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534년 - 김구 사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05년 - 덕잠서원 건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71년 - 덕잠서원 서원훼철령으로 훼철
현 소재지 덕잠서원 유허비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 지도보기
원소재지 덕잠서원 유허비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 지도보기
성격 비석
관련 인물 김구
재질
크기(높이, 너비, 두께) 145㎝[비신 높이]|53㎝[비신 너비]|22㎝[비신 두께]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에 있는 1705년 세워진 덕잠서원을 기념하는 비.

[개설]

덕잠서원자암 김구를 배향하고 있는 예산군의 유일한 사액서원이었다. 서원이 건립된 것은 1705년(숙종 31)이며, 1714년 사액받았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고, 이후 다시 복설되지 못한 채 현재 예산군 예산읍 향전리에 터만 남아 있다. 1942년 김구(金絿)[1488~1534]의 후손들이 유허비를 서원터에 건립하였으나 1984년 덕잠서원의 주향 인물인 김구 묘소 아래 새로 건립하였다.

[건립 경위]

덕잠서원 유허비는 1942년 서원터에 세웠던 것을 1984년 이전하여 새로 고쳐 세웠다. 비석의 뒷면에 “원래의 터에 민가가 즐비하게 세워져 있자 그 터를 회복하지 못하고 덕잠서원의 주향 인물인 자암 김구 선생의 묘소 아래에 세웠다.”라는 기록이 있어 유허비의 건립 경위를 알 수 있다. 1942년 유허비를 건립한 주체는 김구의 사손(嗣孫) 김면익(金冕益) 및 김필진(金弼鎭)과 족인들이었다. 이들은 서원 철폐 이후 지나가는 사람들이 터를 가리켜 서원터라고 말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고 서원을 재건하기는 힘든 상황이므로 비석을 세워 기억하고자 하였다.

[위치]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에 있는 신암면사무소에서 약 100m 떨어진 곳에 김구 묘역이 있다. 김구 묘역 아래에 있는 김구 신도비 옆에 덕잠서원 유허비가 있다.

[형태]

덕잠서원 유허비 비신은 높이 145㎝, 너비 53㎝, 두께 22㎝이다.

[금석문]

비문은 일제강점기의 통제정책사(統制政策事)로 일제에 항거한 성헌(惺軒) 임한주(林翰周)[1871~1954]가 썼다. 1984년 유허비를 다시 세운 주체는 첫 비석을 건립한 다음 세대인 15대손 김인관(金寅觀)이다. 김인관은 김구의 신도비를 세우면서 남은 재료로 1942년 유허비를 고쳐 새 덕잠서원 유허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석에는 임한주의 글을 그대로 쓰고 15대손 정인관이 추기(追記)로 서원의 설립에서부터 훼철, 1984년 비석을 고쳐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약술하였다. 글씨와 전자(篆字)는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15대손인 정길모(鄭吉謨)가 썼다.

[의의와 평가]

덕잠서원자암 김구 사후 예산지역의 유생들이 서원 건립 상소를 올려 세워졌다. 덕잠서원 건립은 김구의 충절과 교우가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비문에 적힌 서원의 설립과 훼철 과정, 일제강점기에 후손에 의해 유허비를 세운 내용 등을 통해 김구덕잠서원을 통한 광산김씨 문중의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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