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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577
한자 田斤金孝子碑
이칭/별칭 전근금 정려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광시동로 251[미곡리210-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41년연표보기 - 전근금 효자비 전근금 정려 건립
건립 시기/일시 1769년연표보기 - 전근금 효자비 건립
이전 시기/일시 1885년 - 전근금 효자비 전근금 정려 이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2년 - 전근금 정려 화재로 소실되고 전근금 효자비만 남음
현 소재지 전근금 효자비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광시동로 251[미곡리210-2]지도보기
성격 효자비
재질
크기(높이, 너비, 두께) 147㎝[높이]|54㎝[너비]|16㎝[두께]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미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선비 전근금의 효자비.

[개설]

전근금 효자비는 선비 전근금(田斤金)[1691~1769]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769년(영조 45) 세운 비석이다. 전근금 정려와 함께 있었으나 1962년 일어난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효자비만 남아 있다.

[건립 경위]

전근금은 예산군 대흥의 미곡리에서 태어난 선비로 개명은 전태운(田泰運)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읽으며 농사일을 열심히 하였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병석에 눕고 말았다. 약을 써도 차도가 없다가 곧 사망하고 이후 어머니 역시 같은 병으로 고생하자 전근금은 밤마다 정성껏 기도를 하였다. 그러자 하늘에서 “너의 피가 어머니 몸에 흐르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말이 들렸고, 급히 집으로 달려가 손가락을 잘라 피를 어머니 입에 흘려 먹이자 신기하게도 완쾌하였다고 한다.

부모의 삼년상 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삼년상 후에도 채식만 하는 등의 효행을 하였다. 전근금의 효성이 알려지자 대흥군과 청양, 홍주, 보령 등의 유생들이 감영에 전근금의 효행을 표창해 줄 것을 진정하였다. 공홍감사가 1738년 왕에게 보고하여 1741년 절충장군으로 품계를 받았다는 내용이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정려를 건립하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현판이 썩는 것이 염려되어 전근금이 죽은 1769년 효자비를 세웠다.

1885년(고종 22) 여름 전근금의 후손 전동수(田東秀)는 단자를 올려 전근금의 정려를 이건하였다. 정려를 이건할 때 ‘나주전씨 삼세삼효(羅州田氏 三世三孝)’라는 현판을 달았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00년대 후반으로 보이는 전근금의 정려 사진이 남아 있다. 다른 정려와는 다르게 초가지붕에 좌우 벽면이 흙으로 되어 있는 독특한 형식이었다. 그러나 1962년 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효자비만 남아 있다.

[위치]

예산군 광시면 소재지에서 북서쪽 길을 따라 2.5㎞ 정도 가면 미곡리가 있다. 미곡리 입구의 버스정류장 오른쪽에 전근금의 효자비가 있다.

[형태]

전근금 효자비는 두 단의 시멘트로 기단을 쌓고 기단 위에 비신을 세웠다. 비신과 이수는 1매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비신 위에는 이수가 올려져 있는데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다투는 모습이 구름과 함께 양각되어 있다. 비신과 이수의 총 높이는 147㎝이고, 너비 54㎝, 두께 16㎝이다. 비각 주변으로 낮은 철책을 둘렀다.

[금석문]

전근금 효자비는 비신의 앞면에는 ‘효자증절충장군전개금개명태운지거 금상십칠년신유십이월 일 명정려이현판공년구역후고기축십이월 일 입비(孝子贈折衝將軍田介金改名泰運之居今上十七年辛酉十二月 日 命旌閭而懸板恐年久易朽故己丑十二月 日 立碑)’라고 쓰여 있다.

[의의와 평가]

나주전씨 절충장군의 후손가에는 전근금을 비롯한 삼세삼효(三世三孝)의 효행과 관련된 문서 18건이 전하고 있어 전근금 효자비와 함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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