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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590
한자 印榮源妻星州裵氏雙孝閣
이칭/별칭 쌍효각,교동인씨 효자 효부각(喬桐印氏 孝子 孝婦閣)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 211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최명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27년연표보기 - 인영원 및 처 성주배씨 쌍효각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5년 - 인영원 및 처 성주배씨 쌍효각 보수
현 소재지 인영원 및 처 성주배씨 쌍효각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 211 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팔작지붕|다포식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효자 인영원과 처 성주배씨의 정려.

[개설]

인영원·처 성주배씨 쌍효각인영원(印榮源)[1850~1906]과 그의 처 성주배씨[?~1874]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인영원은 본관이 교동(喬桐)으로 호는 삼산(三山)이며, 자는 여행(汝行)이고 경릉참봉(敬陵參奉)을 지냈다. 교동인씨입향조 인삼석(印三錫)의 11대손이며 인형상(印衡相)의 둘째 아들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 상을 당한 후 집안이 매우 빈곤하여 남은 재산이 없자 품을 팔아 쌀과 반찬을 마련하여 홀로 있는 어머니를 극진히 공양하였다. 인영원의 효행을 본 마을 사람들은 인영원을 가리켜 효행의 고사로 널리 알려진 “동영(董永)의 화전(貨錢), 자로(子路)의 부미(負米), 황향(黃香)의 편침(扁枕) 등을 말로만 들었더니 이제 실제로 보았다.”라고 칭송하였다. 20세 때 성주배씨를 부인으로 맞은 후 부부가 합심하여 홀로 있는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1857년(철종 8) 겨울 어머니가 병이 들어 상태가 위독해지자 뒷산 정결한 곳에 단을 쌓고 열흘 밤낮을 정성껏 기도하였다고 한다. 마지막 날 한 노인이 문병을 왔다가 돌아가는 꿈을 꾼 후 어머니는 병이 나았다고 전한다. 이후 부부는 매년 정월 초 함께 뒷산에 가서 어머니의 장수를 빌었고 부부의 정성 덕분이었는지 어머니는 17년을 더 살고 1873년(고종 10) 다시 병이 들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부부는 어머니의 사망을 함께 애통해 하였는데, 성주배씨는 결국 병을 얻어 이듬해 세상을 떠나고 인영원은 홀로 어머니의 삼년상을 극진히 치렀다.

[위치]

예산군 덕산면 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10㎞ 정도 가다 보면 낙상리 입구가 나온다. 인영원·처 성주배씨 쌍효각낙상리 입구에서 2㎞ 정도 들어간 도로의 동쪽 길가에 있다.

[변천]

인영원·처 성주배씨 쌍효각은 효자 인영원과 처 성주배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27년 유림들의 주도로 통문을 돌려 경성모성존도원(京城慕聖尊道院)에서 명정을 받아 건립된 것이다. 1927년 이재현(李裁現)이 지은 「창효각약기(彰孝閣略記)」와 2년 후인 1929년 경성(京城) 선성묘성적도오륜행실중판소(先聖廟聖蹟圖五倫行實重判所)에 의한 「찬양문(贊揚文)」에 효행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형태]

인영원·처 성주배씨 쌍효각은 담장에 토담을 두르고 정면에 팔작지붕을 한 문을 만들어 놓았으며, 토담 안쪽에 화강암으로 기단을 조성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다포식 가구를 한 건물을 세웠다. 기단 위에는 화강암으로 된 팔각높은기둥주춧돌과 원기둥을 세웠으며 건물 4면에는 홍살이 돌려져 있다.

[현황]

인영원·처 성주배씨 쌍효각의 정면 상단에는 쌍효각(雙孝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려 내부 정면 상단에는 ‘효자경릉참봉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자헌대부공조판서숭정대부판돈령부사증익효정교동영원지문(孝子景陵參奉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資憲大夫工曹判書崇政大夫判敦寧府事贈謚孝靖喬桐榮源之門)’, ‘효부인영원처정경부인성주배씨지문 지성선사탄강이천사백칠십칠년역고황우청룡 일표정 경성모성존도원(孝婦印榮源妻貞敬夫人星州裵氏之門 至聖先師誕降二千四百七十七年亦雇黃牛靑龍 日表旌 京城慕聖尊道院)’이라고 쓰인 2기의 현판이 걸려 있다.

정려 왼쪽에는 1927년 이재현이 지은 「창효각약기」가 있고, 오른쪽에는 「찬양문」이 걸려 있다. 또한 정려 내부에는 찬성금표(贊成金表)와 찬양문사표(贊揚文士表)가 걸려 있고 정려 앞에는 1983년 세운 인희배(印熙培)의 선행비가 있다.

또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1929년 세워진 인영배(印泳培)의 송덕비(頌德碑)가 있다. 인희배는 인영원의 장남이고, 인영배는 인영원의 큰조카로 정려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인영원의 아들 인희배는 일찍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1926년 자신이 살던 곳에 두 칸짜리 집을 지어 ‘금천사숙’이라 이름 짓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금천사숙은 현재 수덕초등학교의 전신이다. 교동인씨 집안에서는 정려의 수호를 위하여 밭 400여 평[약 1,300㎡]을 ‘효정전(孝旌田)’이라 하고 밭에서 나오는 수확물로 정려를 정비하고 있다. 2005년 인영원·처 성주배씨 쌍효각을 예산군에서 보수하였다. 

[의의와 평가]

인영원·처 성주배씨 쌍효각이 있는 덕산면 낙상리는 일찍부터 교동인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거주하던 곳으로, 조선 초기의 인물 인삼석이 입향한 이래 계속 번창하였다. 쌍효각은 교동인씨의 마을 내 위상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정려 건립 과정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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