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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596
한자 金邦彦金致和旌閭
이칭/별칭 신흥리 효부자 정려,김방언·김치화 부자 정려,김방언·김치화 양세 정려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6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세기 말~18세기 - 김치화 효자 명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83년연표보기 - 김방언·김치화 부자에게 정조가 양세정려문 하사
현 소재지 김방언·김치화 부자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61 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익공식
정면 칸수 2칸
측면 칸수 1칸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효자 김방언김치화의 정려.

[개설]

김방언·김치화 정려는 조선 후기의 효자 김방언(金邦彦)[1693~?]과 아들 김치화(金致和)[?~?] 부자(父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호서읍지』에 의하면 김방언김치화 부자는 선비로 효행이 뛰어났다. 김방언은 아버지가 병이 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중을 들었고, 병이 악화되자 손가락을 깨물어 자신의 피를 수혈하는 등의 효행을 보였다. 할아버지에게 효심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김치화 또한 아버지 김방언이 기이한 병을 앓자 먼저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이고 극진히 보살폈다. 그러나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죽자 3년 동안 시묘를 하였고 시묘를 마치는 해 “아버지께서 지하로 돌아가시니 누가 옆에서 모시겠습니까? 지하에서 아버지를 따르겠습니다.”라며 2살이 된 아들 김민형(金敏炯)을 두고 사망하였다.

[위치]

김방언·김치화 정려예산군 광시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4.5㎞ 떨어져 있는 김한종 의사 생가지 안내 표지판 뒤에 있다.

[변천]

김치화의 아들 김민형이 감영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효행에 관한 상소를 20번이나 올려, 처음에는 김치화의 효자 명정만 받았다. 이에 김치화의 부인 신씨는 아들로 하여금 혈서를 써서 상소하도록 하고 화성(華城)으로 행차하는 대가 앞에 읍소하여 남편의 정려문을 시아버지에게 옮겨 주어 죽은 남편의 효성스러운 혼을 위로해 주기를 청하였다. 감영에서 조사한 결과 ‘두 효자에 한 열부’라고 보고하였다.

정조는 “김방언·김치화 부자를 표창하여 정려하는 일은 신씨의 효성에 감동한 소치이다. 해당 고을로 하여금 이 전교의 내용을 신씨에게 타일러 가르쳐 주며, 판부한 내용을 한문과 언문으로 등사하여 길거리에 게시해서 온 도의 선비와 백성들로 하여금 보고 감동하는 자료로 삼게 하라.”고 전교하고 1783년 양세정려문을 내렸다. 『승정원일기』 1783년[정조 7] 5월 5일 기사에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조에서 효행등제단자를 모아 엮은 『효행등제등록(孝行等第謄錄)』에 의하면 1783년 정려질(旌閭秩)에 김치화가 올라 있지만 김방언의 이름은 올라 있지 않다. 그러나 명정 현판에는 같은 날 명정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형태]

김방언·김치화 정려는 길가에 시멘트로 기단을 조성한 뒤 세워져 있는데 정면 2칸, 측면 1칸 익공식 건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 양식을 하고 있다. 높은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올렸는데 하방 아래는 고맥이를 설치하고 창방 위에는 5개씩 소로를 올렸다. 정려의 4면에는 홍살을 둘렀으며 정려의 내부 상단에는 2개의 명정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정려 내부에 있는 2개의 명정 현판에는 각각 ‘효자학생김방언지문 상지칠년계묘오월 일 명정(孝子學生金邦彦之門 上之七年癸卯五月 日 命旌)’, ‘효자학생김치화지문 상지칠년계묘정월 일 명정(孝子學生金致和之門 上之七年癸卯正月 日 命旌)’이라고 쓰여 있다.

[현황]

『문화유적분포지도-예산군』에는 정려 내부 북쪽 상단에 1861년 정구석(鄭龜錫)이 지은 ‘소태김씨양세정려명(昭台金氏兩世旌閭銘)’, 1861년 후손 김상은(金相殷)이 지은 ‘양세정려의관근식(兩世旌閭懿寬謹識)’ 현판 2기와 1861년 이운용(李雲用)이 지은 ‘정려중수상량문(旌閭重修上樑文)’이 걸려 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2018년 현재 3기 모두 확인할 수 없다.

[의의와 평가]

정려 명정을 받는다는 것은 지역 사회의 지지기반이 필요한 만큼 김치화의 아들 김민형이 올린 상소와 김치화의 부인 신씨의 도움이 컸다. 김방언·김치화 정려는 ‘두 효자에 한 열부’라고 평가되는 등 예산의 효 정신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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