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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598
한자 金義載妻昌原黃氏旌閭閣
이칭/별칭 김의재·창원황씨 부부 정려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고도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91년연표보기 - 김의재·처 창원황씨 정려 건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91년 - 김의재·처 창원황씨 정려 명정
현 소재지 김의재·처 창원황씨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고도리 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고도리에 있는 효자 김의재와 부인 효부 창원황씨의 정려각.

[개설]

김의재·처 창원황씨 정려각김의재(金義載)[1804~1859]와 그의 처 창원황씨(昌原黃氏)가 1891년(고종 28) 함께 명정을 받아 건립되었다.

김의재는 본관이 경주(慶州)이고, 자는 성필(聖弼)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한상(金漢相), 할아버지는 김악주(金樂柱), 아버지는 김노환(金魯煥),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이다. 김의재는 1804년(순조 4) 5월 4일 홍주 합덕리[현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에서 태어났다. 김의재는 11세에 아버지 상을 당하자 어른과 다름없이 시묘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나 오이와 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구해 먹였다. 부인 창원황씨와 더불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 병구완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3년간 울며 시묘하였다. 김의재는 1859년(철종 10) 56세에 사망하여 고도리에 묻혔다.

[위치]

김의재·처 창원황씨 정려각예산군 봉산면 고도리 야산의 남향사면 중하단부에 있다.

[변천]

김의재 사후 1887년(고종 24) 도내 인사들에 의해 부부의 효행이 알려져 김의재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증직되고, 창원황씨는 숙인(淑人)으로 증직되었다. 부부가 함께 1891년 명정되었다. 정려는 효자 김의재와 처 열녀 창원황씨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부부가 살았던 마을인 고도리에 건립되었다.

[형태]

김의재·창원 황씨 부부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 양식이다. 정려 4면은 홍살이 둘러져 있고, 양옆의 박공 아래에는 방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현황]

정려각의 내부 중앙의 앞쪽 상단에는 ‘효자 증통훈대부사헌부감찰 김의재지문(孝子贈通訓大夫司憲府監察金義載之門)’ 현판이 있고, 뒤쪽 상단에 ‘효열부 증통훈대부사헌부감찰 김의재 처 증숙인 창원황씨 지문(孝烈婦 贈 通訓大夫司憲府監察金義載妻贈淑人昌原黃氏之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명정 현판은 모두 낡았는데, 특히 창원황씨의 명정 현판은 색이 많이 바래서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정려 주변에는 낮은 철책으로 된 보호시설이 설치되어 있으며 주변은 밭으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예산군 봉산면 고도리경주김씨가 언제부터 살기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고도리와 접한 서산에 경주김씨가 많이 세거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서산 경주김씨와 연관된 집안이라 추측할 수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5.19 명칭 수정 정려를 정려각으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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