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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634
한자 德岑書院-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터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 덕잠골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05년연표보기 - 덕잠서원 건립
폐지 시기/일시 1871년연표보기 - 덕잠서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14년연표보기 - 덕잠서원 사액 받음
소재지 덕잠서원터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 덕잠골 지도보기
성격 서원터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 덕잠골에 있는 조선시대에 설립된 덕잠서원의 터.

[개설]

덕잠서원은 충청남도 예산군출신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귀향하여 사망한 자암(自庵) 김구(金絿)[1488~1534]를 제향하고 있는 예산군의 유일한 사액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덕잠서원은 1871년 훼철되었다.

[변천]

『서원등록』에 의하면 덕잠서원의 창건 과정은 1703년(숙종 29) 10월 예산 유학 임주국(林柱國) 등이 서원 건립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허락받았다. 상소에서 김구의 도와 덕, 출처시종이 조광조, 김정과 다름없는데 조광조와 김정은 사우에 제향되고 있으나 김구만 제외되었음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청건 상소로 1705년에 서원이 건립되었으며, 1714년(숙종 40) 왕이 특별히 제관을 보내어 제문과 덕잠서원(德岑書院)이라는 친필 액자를 하사하여 사액서원으로 격이 높아졌다. 각종 관찬서에 1714년 10월 사액을 받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당시 예관으로는 예조정랑 박사동(朴師東)이 파견되었으며「사액치제문(賜額致祭文)」이 『광산김씨직장공파보(光山金氏直長公派譜)』에 수록되어 있다.

1814년(순조 14) 작성된 중수기를 살펴보면, 건립된 지 100여 년이 지나 건물이 낡고 퇴락하였음으로 당시 순조의 장인이자 서원의 원장이었던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1765~1832]이 비용을 전담하여 1803년(순조 3) 사우부터 고치고, 뒤에 강당과 신문 등의 중수를 꾀하다가 1813년 마쳤다고 한다. 중수기는 김돈서가 썼는데, 김돈서는 묘비를 찬하였던 김세렴의 현손이다. 중수에는 예산현감 이명하와 장의 조문원·김익서, 별유사 김종복이 참여하였다.

1830년(순조 30) 남양홍씨 홍병식의 주력으로 재실을 비롯하여 담장, 중문, 외문도 중수하였다. 이때의 중수기를 쓴 것도 김돈서이고 예산현감 이재정과 장의 허간·홍병식, 별유사 김익서가 참여하였다. 이후 1856년(철종 7)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金左根)[1797~1869]이 원장이 되어 경비를 부담하여 다시 중수와 보수를 추진하였다. 이때 중수기에는 서원이 낡아 서원 유생들과 수령이 중수 경비 마련을 걱정하는 것을 본 김좌근이 3천 금을 내 새 기와를 올리고 담과 뜰을 단장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중수기를 쓴 사람은 토정 이지함의 후손 한산인 이장찬이고, 예산현감 홍훈모, 장의 성맹환·김현오, 후손 김달수가 주력하였다. 이후 덕잠서원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다시 복원되지 못하였다.

[위치]

덕잠서원 터예산군 예산읍 향천리 금오산의 동쪽 덕잠골로 예산향교의 뒷산 너머 남동향 비탈에 있다.

[현황]

1868년 훼철된 이후 터만 남았고 김구의 후손이 서원 현판을 보관하고 있다. 덕잠서원터는 현재 민가가 들어서 있어 흔적을 찾기 어려워 1984년 김구 묘소 앞에 덕잠서원 유허비를 세웠다. 유허비문은 팽성 임한주가 썼고, 추기는 1984년 15대손 김인관과 문익공의 15대손 정길모가 썼다. 유허비 바로 옆에는 김구의 신도비가 있고 앞쪽 길가에는 1816년 명정을 받은 김구의 손자 김갑의 효자 정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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