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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1079
한자 天主敎
이칭/별칭 성당,구교,가톨릭교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성준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에 있는,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기독교의 교파.

[개설]

천주교는 그리스도의 정통 교의(敎義)를 믿는 종교로,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로마가톨릭교를 말한다. 천주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스스로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에 수용되었다. 천주교는 1890년대에 서울·경기 지역에 이어 내포 지역까지 전래됨으로써 예산 지역도 일찍이 영향을 받았다. 조선 후기에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약 100년간 모진 박해를 받아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그럼에도 내포 지역에는 천주교 신앙의 뿌리가 확고하게 내려져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1890년대 이후 본당과 공소가 많이 설립되었다. 예산 지역도 이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아 1927년 예산성당을 시작으로 2008년까지 총 7개의 성당이 설립되어 신앙 활동을 이어 왔다.

[천주교의 한국 전래]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전래된 시기는 조선 정조 때인 1880년대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 없이 남인 계통의 유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1777년부터 경기도 광주의 사찰 주어사 천진암에서 권철신·권일신 형제와 정약전·정약종·정약용 형제, 이승훈, 이벽 등 10여 명이 참여한 강학회가 열려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 서학(西學)[처음에는 천주교가 서양의 학문으로 인식되었기에 붙여진 명칭] 서적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종교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1784년 사신 행차를 따라 북경에 간 이승훈은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은 후 신앙 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 묵주 등 천주교 성물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승훈이 다른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중인 김범우의 집 명례방[현 명동성당 자리]에서 정기적으로 신앙 집회를 열었다. 천주교는 부녀자와 평민 계급에게도 전파되었으며, 서울에서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으로 번졌다.

[변천]

충청도에 천주교를 전파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이존창(李存昌)이었다. 이존창은 1785년경 스승 권일신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고향 내포 여사울[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서부터 전도 활동을 전개하여 양반, 양인은 물론 천민들을 대거 입교시켰다. 그 후 천주교는 이도기, 정산필, 김풍헌 등의 활동을 통하여 공주, 홍성, 부여와 전라도 북부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1795년 초에 조선에 잠입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에 의해 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리나 조선 정부는 신분 평등을 설파하고 유교적 제사를 거부한 천주교를 강력하게 박해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정약종, 이존창, 강완숙 등 초기 교회 지도층이 순교하였다. 황사영은 「백서(帛書)」를 써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였고, 정하상, 이여진, 신태보 등은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면서 성직자 영입을 위해 로마교황청에 편지를 보냈고, 그 결과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신부]들이 속속 밀입국하였다. 1831년에 조선교구가 설정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1866년부터 5년간 계속된 병인박해는 최대 최후의 박해였다. 박해의 시대 신자들은 산골에 신앙 공동체인 교우촌(敎友村)을 만들었으며, 비밀리에 전국을 순회하며 사목(司牧) 방문을 하는 사제로부터 간혹 미사와 성사(聖事)를 받았다. 조선 후기 천주교 신도들은 성리학적 관념을 타파하고 신분 평등을 지향함으로써 사회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한글 전용 교리서와 천주가사(歌詞)를 보급하여 서민문화 발달에 기여하였다. 천주교는 1886년 한불수호조약에 의해 공식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1877년 9월 프랑스 선교사 두세(C. Doucet)[丁加彌, 가밀로] 신부와 로베르(P. Robert)[金保祿, 바오로] 신부가 제6대 조선교구장 리델 주교와 함께 황해도를 통해 조선에 입국하였다. 1883~1884년 두세 신부는 충청도의 천안, 아산, 예산, 홍주, 당진, 서산, 공주, 부여, 논산, 서천과 경기도의 안성, 평택 등을 순회하며 모두 35개의 교우촌을 공소로 설정하였다. 1890년 8월에 퀴를리에 신부는 예산 양촌[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양촌본당을, 파스키에 신부는 예산 간양골[현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에 간양골본당을 설립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내포에서도 거세게 일어나자, 퀴를리에와 파스키에 신부는 일단 서울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파스키에 신부가 병이 깊어져서 홍콩으로 요양을 감으로써 간양골본당은 아산 공세리로 옮겨졌다.

[현황]

예산 오리동성당은 1927년 합덕성당에서 분가하였다. 1988년 산성리본당이 분가·설립되기 전까지 예산본당으로 불렸다. 초대 주임으로는 합덕본당의 보좌신부였던 구천우 요셉 신부가 파견되었다. 분리 당시 합덕주임 페랭 신부에 의하면 예산 읍내 교우는 약 5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간양골, 신례원, 오촌 등 주변의 옹기 교우촌과 공소의 신자수가 증가 추세에 있었다. 초대 회장 윤창규의 희사와 교우들의 노력으로 일찍부터 성당 건축을 추진하였고, 현재의 성당은 1934년에 완공하여 1935년 9월 봉헌식을 가졌다. 1950년 홍성본당을 분가시켰으며, 1966년 삽교본당, 1977년 신례원본당, 1988년 산성리본당을 각각 분리시켰다. 현재 예산성당이라 불리며 충청남도 기념물 제164호로 지정되어 있다.

삽교성당은 예산군 삽교읍 신가리에 있다. 1966년 예산본당에서 분리되었으며, 초대 본당 주임은 에밀 보드뱅 신부이다. 현재의 성당은 1967년 4월 24일 봉헌식을 가졌다. 삽교는 복자 인언민을 배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천주교 초창기부터 교우촌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곳이었다. 본당에서는 인근의 삽교천변 ‘배나드리’를 함께 관리하고 있다. 1979년과 1986년에 덕산본당과 응봉본당을 각각 분리시켰으며, 2017년 6월 10일에는 본당설립50주년감사행사를 가졌다.

신례원성당은 예산군 예산읍 창소리에 있다. 1977년 10월 19일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 설립되었다. 초대 우희수 발타사르 주임신부 재임기에 현재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분리 당시 본당의 관할구역 내에는 내포의 천주교회의 시작으로 일컬어지는 여사울공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계촌리수철리와 같은 오래된 공소들로 인하여 대를 이어 신앙생활을 하는 이른바 구교우들이 많았다. 이후 여사울은 2008년에 분리하여 담당신부가 파견되는 등 본격적인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었다. 한편 2014년 이후로 이상호 요한 신부의 주도로 수철리공소를 정비하여 순례자들로 하여금 공소신앙의 유산을 체험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덕산성당은 예산군 덕산면 읍내리에 있으며, 1979년 9월 19일에 삽교본당에서 분리·설립되었다. 초대 주임은 이창덕 마르코 신부이다. 관할구역은 읍내리를 중심으로 고덕, 구만리, 목리, 대치리 등이다. 현재의 성당은 1984년에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덕산은 조선시기 관아가 있던 곳이고, 남연군묘 등 천주교 역사와 밀접한 곳이 많다. 더욱이 해미성지로 연결되는 순례길에 있어 순례자들의 거점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응봉성당은 예산군 응봉면 노화리에 있다. 1986년 4월 1일에 삽교본당에서 분리·설립되었다. 김진화 바오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고, 현재의 성당은 제4대 주임 변갑선 치릴로 신부에 의해 2001년에 건축되었다.

예산 산성리성당은 예산읍 산성리에 있으며, 예산역과 가까워 역전성당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1988년 8월 17일 예산본당에서 분리되어 윤여옥 안토니오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현재의 성당은 1991년부터 건축을 시작하여 제 2대 주임 방경석 알로이시오 신부 재임 중인 1998년에 봉헌식을 가졌다.

1899년 양촌에서 합덕으로 이전한 합덕성당에서 1927년 예산성당이 분리되었으며, 이후 1967년 삽교성당, 1977년 신례원성당, 1979년 덕산성당, 1986년 응봉성당, 1988년 예산산성리성당, 2008년 여사울성지성당이 분리 설립되었다. 그리고 각 성당마다 2~5개의 공소를 거느리고 있다. 예산 지역은 내포 지역의 당진, 서산, 홍성 지역과 함께 천주교의 뿌리가 깊고 신자들의 신앙심이 깊은 곳이며, 천주교 성당과 신자 수와 관련 성지가 많다. 역사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지역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지역 발전에 이바지하는 바도 크다.

[의의]

예산 지역의 천주교는 조선 후기부터 이어온 순교 신앙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아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확고한 위상을 갖춘 교회로 성장하였다. 현대 한국천주교회에서도 성직자·수도자를 많이 배출하는 등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 역할을 다하여 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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