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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1081
한자 桂村里公所
이칭/별칭 강당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계촌2길 62[계촌리 263]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한성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890년연표보기 - 계촌리공소 진말공소로 시작
개칭 시기/일시 일제강점기 - 진말공소에서 계촌리공소로 개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9년 - 계촌리공소 합덕본당 소속으로 변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7년 - 계촌리공소 예산본당 소속으로 변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7년 - 계촌리공소 신례원성당 소속으로 변경
최초 설립지 진말공소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계촌2길 62[계촌리 263]
현 소재지 계촌리공소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계촌2길 62[계촌리 263]지도보기
성격 종교 기관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계촌리에 있는 신례원성당 소속 공소.

[개설]

계촌리공소(桂村里公所)는 조선 후기 천주교 전파 초기부터 신자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곳이다. 박해가 심할 때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타 지역으로 이주했다가, 1886년(고종 23)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진말공소가 설립되었다. 당진시 합덕읍 양촌본당 소속이었던 진말공소는 현재 예산읍신례원성당 소속의 계촌리 공소가 되었다.

[설립 목적]

1890년대에 진말공소[지금의 계촌리공소]가 설립된 것은 박해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앙의 맥을 이어서 예산 신암 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뿌리를 튼튼히 내리기 위해서였다.

[변천]

1780년대 여사울[지금의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살던 이존창[세례명 루도비코]이 내포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할 때, 계촌리에도 당연히 전파되어, 1790년대에는 천주교 교우촌[공소]도 생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1801년(순조 1)의 신유박해 이후 100년간 계속된 천주교 박해로 인해 신자들 대부분은 충청도와 전라도 등의 산골로 피신하였다. 1886년 프랑스와 수교를 맺고 공식적으로 천주교 신앙이 허용된 후, 1890년 내포 최초로 간양골본당과 합덕 양촌본당이 세워졌고, 계촌리에는 합덕 양촌본당 소속의 진말공소가 설립되었다. 1899년양촌 본당이 당진시 합덕읍으로 이전하여 합덕본당이 되자, 합덕본당 소속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진말은 계촌리로 명칭이 바뀌었고, 1927년 합덕본당에서 예산본당이 분할되자 예산본당 소속이 되었다. 1977년 예산본당에서 신례원본당이 분할됨으로써 현재까지 신례원성당 관할의 공소가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계촌리공소는 내포 지역 천주교 신앙의 중요한 보금자리 중 하나로서, 박해 시대에는 신앙의 근거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초기 천주교 신앙 공동체의 전통을 계승하고 선교하며 성직자와 수도자를 다수 배출하는 등 내포 지역 천주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맡아 왔다.

[현황]

전반적인 인구의 도시 집중과 농촌 인구의 감소 현상으로 1980년대 이후 신자 수가 계속 감소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계촌리공소는 이웃한 여사울공소와 함께 예산 신암 지역 천주교의 중심지였으며, 박해 시대의 전통을 간직한 유서 깊은 공소로, 현대에 와서도 천주교 성직자와 수도자를 다수 배출한 곳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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