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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1527
한자 梅軒尹奉吉義士-愛國精神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김상기

[정의]

충청남도 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의 생애와 애국정신.

[윤봉길의 수학 과정과 농촌계몽운동]

윤봉길(尹奉吉)[1908~1932]은 1908년 6월 21일[음력 5월 19일]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윤황과 경주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봉길은 별명이고 본명은 윤우의(尹禹儀)이며 호는 매헌(梅軒)이다. 여섯 살 때부터 큰아버지가 운영하는 서당에서 천자문을 공부하였다. 11세 때인 1918년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듬해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의 종살이 하라는 교육을 받아서 뭘 하겠느냐면서 자퇴하였다. 1921년부터는 성주록이 훈장으로 있는 오치서숙에서 경서를 공부하였다. 한시에 특별한 재능을 보여 시회(詩會)에서는 장원을 자주 하였다. 한학을 공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다. 16살이 되던 해에는 『일어속성독본』이란 책을 사다가 일본어를 자습하였다. 『동아일보』나 『개벽』과 같은 잡지를 구해서 보았으며 성경을 읽기도 했다. 성주록은 윤봉길이 18살 나이가 되었을 때 더 가르칠 것이 없다면서 매헌(梅軒)이란 호를 지어 주었다. 서숙을 나온 윤봉길은 성주록의 안내에 따라 홍성의 유교부식회에 가입하였다. 유교부식회는 홍주의병장 김복한(金福漢)의 제자들이 1927년에 홍성에서 설립한 유교진흥 단체였다. 유교부식회는 수시로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유교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일본 경찰에 의해 금지될 정도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이 많았다.

윤봉길은 공동묘지묘표사건을 계기로 일제총독부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지(無知)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문맹퇴치를 위하여 야학을 열고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마을 청년들과 독서회를 조직하고 월례강연회도 개최하여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자고 역설하였다. 윤봉길은 이때 학생들을 가르칠 교재인 『농민독본』을 편찬하였는데, 농민의 지식을 각성시키는 데 그 취지가 있었다. 야학에서는 학예회도 실시하였다. 그런데 1929년 3월 28일 야학에서 개최한 학예회가 문제가 생겼다. 이날 학예회는 「토끼와 여우」라는 이솝 우화를 각색한 것으로, 토끼와 거북이가 자신들의 먹이를 여우에게 빼앗기는 내용을 잘 묘사하였다. 그런데 윤봉길은 다음 날 이 일로 덕산주재소에 불려갔다. 여우를 일제에 비유했다는 것이 윤봉길이 호출당한 이유였다. 윤봉길은 순사의 경고와 훈계를 받았다. 윤봉길은 이 일을 겪고 나서 농촌계몽운동도 민족의 독립이 있은 후에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학을 운영하면서 한편으로 농민의 경제 자립을 위하여 농민회를 조직하였다. 윤봉길은 특용 작물을 재배하여 생산량을 늘리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마의 재배법을 개선하고 양잠 및 축산을 권장하여 농가의 소득을 증대시켰다. 수내제도라고 하는 특별한 방식도 채용하였다. 1929년 4월 부흥원에서 월진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월진회는 회원의 의무에 대하여 매우 엄격함을 보였는데, 회원은 매월 10전씩 저금을 해야 했으며, 매월 정기적으로 저금하도록 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직후에는 야학에서 학생들에게 항일 정신을 불어넣어 주고 투쟁에 나설 것을 권하였다. 윤봉길은 강연에서 일제의 칼날 아래 민족과 나라를 위해 희생한 학생들의 원한 맺힌 참상을 볼 것을 호소하였다. 이러한 윤봉길의 민족교육을 알게 된 일제는 결국 야학을 강제로 폐쇄하고 윤봉길을 구속하고 말았다. 윤봉길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윤봉길은 야학의 학생들에게 “뜨거운 피로 적과 싸우고 횡포한 왜적을 모두 죽이고 승리의 깃발을 손에 들고 우리나라 만세를 크게 외칩시다.”라는 이별사를 하고 고향을 떠나 혁명운동을 위해 상하이를 향하였다.

[중국으로의 망명]

윤봉길은 1930년 3월 6일 ‘사내가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을 남겨놓고 집을 나왔다. 윤봉길삽교역에서 경남선(京南線) 열차를 타고 서울에 가서, 다시 신의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선천역에 도착할 즈음 기차 안에서 소지품까지 조사를 당하고 선천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3월말 선천경찰서에서 나와 압록강을 건너 칭타오로 갔으나 노자가 떨어져 길거리에서 유랑 생활을 했다. 다행히 나카하라 켄타로[中原兼太郞]라고 하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세탁소의 점원으로 취업하였다. 윤봉길은 월급을 받게 되면서 고향에서 가지고 온 월진회 자금도 보냈다. 칭타오에서의 세탁소 직원 생활 1년이 되어 월급을 올려 준다는 것을 거절하고 상하이로 갔다.

1931년 5월 8일 상해에 도착한 윤봉길은 우선 생계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삼 행상에 나섰다. 그런데 중국어도 서툴고 수완도 없어 아무런 수익도 남기지 못하고 행상을 그만두고 말았다. 프랑스조계에 있는 말털로 모자를 만드는 종품공사의 직공으로 취직하였다. 이 종품공사는 한국인 박진(朴震)과 중국인의 합자로 출발한 회사였는데 서로간의 이익 배분 문제로 자주 충돌이 일어났다. 윤봉길은 한인친목회를 조직하였다. 친목회가 생긴 다음부터 직공들 간에 서로 싸우던 일도 그치고 서로 아끼는 분위가 조성되었다. 생산량도 증가하였다. 그런데 공장주는 오히려 직공들의 임금을 낮췄다. 이에 윤봉길은 친목회 간부들과 공장주를 찾아가 직공들의 임금을 원상회복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공장주는 오히려 윤봉길을 해고하였다.

[상하이 의거]

윤봉길은 종품공장을 나온 후 프랑스 조계 마랑로 보경리에 기숙하면서 홍커우시장에서 밀가루와 채소 장사를 하였다. 이봉창 의거의 소식을 알고 나서 김구를 찾아갔다. 백범 김구와는 종품공사에 있던 1931년 7월 이후 여러 차례 만난 바 있었다. 김구가 상하이에는 어떤 목적으로 왔느냐고 묻자 윤봉길은 독립운동의 본부가 상하이에 있다고 하여 왔다고 대답한 바가 있었다. 김구를 만난 윤봉길은 죽을 자리를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구윤봉길의 목숨을 건 결심을 듣고 마음속으로 탄복하였다. 김구윤봉길을 종품공장에서 보았을 때 처음에는 학식은 있으나 생활을 위해 노동을 하겠거니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 보니 몸을 바쳐 큰 뜻을 이룰 대장부였던 것이다. 김구는 4월 29일 있을 일본군의 천장절 경축식을 특공작전을 감행할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있었다. 김구윤봉길에게 거사를 책임질 것을 위임하고 돈을 주면서 거사 준비를 하도록 했다. 김구의 말을 듣고 “저는 이제부터 가슴에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라고 말했다.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윤봉길은 다음 날 경축식이 있을 홍구공원을 사전 답사하였다. 그리고 나서 일본인 상점에 가서 일본 보자기 1장을 구입하고 숙소를 프랑스 조계의 베이러루[貝勒路]에 있는 호텔 동팡공우[東方公寓] 30호로 옮겼다. 김구와 함께 베이러루 신천상리(新天祥里) 20호 안공근의 집으로 가서 양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4월 29일 아침 윤봉길은 김구와 함께 아침밥을 먹고 자신의 시계를 김구에게 주면서 시계를 바꾸자고 하였다. 김구윤봉길에게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라고 목메인 소리로 작별했다. 윤봉길은 김구와 이별하고 홍커우공원의 정문으로 입장하였다. 중국인 문지기가 입장권을 제시하라고 하였지만, 그는 “나는 일본인이다. 입장권 따위가 왜 필요한가.”라고 일축하고 그대로 공원으로 들어갔다. 윤봉길이 아침 일찍 들어간 것은 이른 시간에는 중국인 수위가 경비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입장권이 없는 상태에서 중국인에게 일본인처럼 보여 입장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윤봉길은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양복과 스프링코트를 입었다. 거기에 일본 보자기로 싼 도시락과 일본 수통을 메었으니 중국인 경비의 눈으로 볼 때에는 틀림없이 일본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홍커우공원에서 개최된 기념식은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과 상하이사변의 승리를 축하하는 전승축하식을 겸하였다. 행사장에 들어오는 일본인들은 손마다 일장기를 들고 공원으로 몰려들었다. 공원의 정문은 화려한 색깔의 천으로 장식되었고, 일본 해군기와 육군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정문 옆에는 ‘경축만세 만만세’라고 쓰여 있는 홍색 천이 걸려 있었다. 공원 안에는 상하이 거주 일본인 1만 명이 입장해 있었다. 거기에 상하이 파견 일본군 제9사단과 해병대 병력 1만 2000명, 그외에 각국의 사절과 각계 초청자를 합하여 3만여 명의 군중이 법석을 이루었다. 시라카와를 비롯한 시게미쓰, 우에다, 노무라 등 줄지어 사령대에 올라 일자형으로 도열하였다. 천장절을 경축하는 군악대의 연주가 끝난 후, 시라카와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의 연설이 있었다. 연설이 끝난 10시 30분부터 분열식이 이어졌다. 행사장 상공에는 18대의 비행기가 저공으로 곡예 비행을 하면서 분위기를 달구었다. 이어서 제2부 축하식이 거행되었다. 사령대는 공원의 중앙 쪽에 설치되었다. 단상 위에는 모두 7명이 도열하였다. 앞쪽의 왼편부터 주중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가 자리 잡고, 그 옆으로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 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 해군사령관 노무라 요시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거류민단 행정위원장 가와바타 사다쓰구[河端貞次], 그리고 민단서기장 토모노[友野盛] 등이 그들이었다. 마침 그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단상에 일본군 수뇌(首腦)들이 도열한 채 가와바타와 무라이의 축사가 끝났다. 이어서 참석자 모두가 일어서서 엄숙하게 기미가요를 합창하였다. 이들이 기미가요 2절의 마지막 소절을 부를 때, 참석한 일본인 모든 이가 신성한 기분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 윤봉길은 이 순간이 최적의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윤봉길은 식단을 향하여 2칸 정도 앞으로 전진하였다. 이때 식단 뒤에서 말을 타고 경계를 하던 기병 2명이 이를 수상히 여겨 검문하려고 말에서 내렸다. 그 순간 윤봉길은 도시락형 폭탄을 땅에 내려놓고, 수통형 폭탄을 어깨에서 내려 오른손에 폭탄을 들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잡아당긴 후, 식단을 향하여 폭탄을 투척하였다. 오전 11시 50분경이었다. 윤봉길이 투척한 폭탄은 정확하게 단상 위의 가와바타와 시게미쓰 사이에 떨어졌다.

커다란 폭음과 함께 파편이 사방으로 날았다. 단상에 있던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비롯하여 7명은 모두 쓰러졌고 행사장은 수라장이 되었다. 시라카와 대장은 얼굴에 부상을, 시게미쓰 공사는 발에 중상을 입었으며, 무라이 총영사는 얼굴과 왼쪽 발에 부상, 노무라 사령장관은 머리와 발에 중상, 가와바타 상해거류 일본민단장은 배와 다리에 중상, 도모노 민단서기장은 발, 얼굴, 손에 부상을 입었다. 이 중 가와바타의 부상이 가장 심하여 단상 위에 꿇어앉아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가와바타는 다음 날 복민(福民)병원에서 사망했다. 시라카와는 얼굴과 복부에 부상을 입었지만 약 4주간 치료를 요하는 정도로 그리 심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5월 20일부터 혈변이 보이는 등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었다. 패혈 증세가 나타났으며 의료진이 긴급 수혈을 하고 대수술을 실시하는 등 치료를 했다. 일왕은 5월 23일 남작 작위와 사주(賜酒)를 내리는 등 특별대우를 하였으나, 결국 5월 26일 사망하였다.

윤봉길은 투척과 동시에 바닥에 내려놓았던 도시락형 폭탄을 주우려 하였으나, 부근에 있던 육전대지휘관 호위병 고모토[後本武彦] 일등병조와 헌병들에 의해 제압되었다. 윤봉길은 군중들에 의해 둘러싸여 잠시 기절할 정도로 뭇매를 맞았다. 옷이 찢겨지고 얼굴도 피투성이가 되었다. 일본 헌병대가 군중들 사이에서 윤봉길을 끌어냈다. 얼굴부터 허리까지 선혈이 낭자한 모습이었다. 옷소매 사이로도 연신 피가 흘러내렸다. 윤봉길은 비록 중상을 입었지만, 태연하게 냉소를 지으며 헌병대로 끌려갔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곧바로 홍구공원 맞은편의 상하이 제1헌병분대에 유치되어 조사를 받았다. 헌병대에서 10시간이나 심문을 받았다. 윤봉길은 자신이 폭탄을 투척한 사실을 시인하고 자신의 이름, 주소, 직업, 나이 등을 밝히는 외에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일본 헌병은 입을 열게 하려고 온갖 가혹한 고문을 동원하여 윤봉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밤낮으로 이어지는 고문으로 이미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기까지 하였다. 1932년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그해 11월 18일 일본 우편수송선에 실려 상하이를 출발하여 고베항[神戶港]을 거쳐 오사카 육군위수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다시 12월 18일 오사카헌병대의 감시를 받으며 오사카 발 기차를 타고 오후에 니시가나자와[西金澤駅]역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자마자 수갑을 찬 채로 군용차에 실려 제9사단 위수구금소에 수감되었다. 다음날 12월 19일 아침 6시에 구금소를 나와 교외인 미쓰고지[三小牛]에 있는 육군작업장으로 끌려가 총살형이 집행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윤봉길의 유해는 일본 신문에 보도된 것과는 달리 화장되지 않았다. 육군 형법에 따라 육군 묘지에 묻히지도 않았다. 육군 묘지 아래에 일반인이 왕래하는 통로에 암장한 것이다. 그로부터 13년 후 발굴되기 전까지 지나는 사람들에 의해 밟히고 밟혔다. 이는 유해에 대해 모욕을 가하고자 한 의도로 보인다. 또한 통로에 매장함으로 혹시 모르는 도굴을 감시하기 위한 뜻도 있었다. 유해 발굴은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 3월에 이루어졌다. 발굴단은 수습한 유골을 모시고 1946년 3월 8일 가나자와역을 떠나 다음날 아침 도쿄의 우에노역에 도착하여 간다[神田]에 설치한 임시정부 출장소에서 추도식을 행했다. 박열을 비롯한 수많은 동포들과 학생들의 참배가 있었다. 그의 유해는 5월 5일 이봉창과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부산에 환국하였으며, 7월 6일 임시정부 주최로 사회장을 개최하고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애국정신]

윤봉길의 애국정신은 농촌계몽론과 자주독립론, 무력투쟁론, 그리고 자유평등론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윤봉길은 농민을 계몽하여 농촌을 부흥시켜야 한다면서 농촌계몽론을 주장하였다. 농촌계몽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야학을 개설하였으며, 목계농민회와 월진회 등을 조직하여 농민의 지식 함양과 아울러 생활 향상을 꾀하고자 노력하였다. 윤봉길은 농촌계몽을 위하여 농사기술과 새로운 재배법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윤봉길 농촌계몽론의 바탕에는 윤봉길이 수학한 유교 정신이 깔려 있었다. 윤봉길은 항일 의식으로 무장된 자주독립론을 주장하였다. 윤봉길의 자주독립론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존의식을 기반으로 한 특성이 있다. 이에 따라 일제의 민족 차별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표출하였다.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일제의 폭압통치하에서 민족의 자주독립이 농민의 계몽보다 절대적으로 우선한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계몽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윤봉길은 점차 직접적인 무력투쟁론을 주장하였다. 일제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피를 흘리면서 투쟁해야 한다고 보았다. 결국 망명의 길을 택하였으며, 청년들에게 총칼을 들고 나가 일제에 항쟁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자신이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 그가 무력투쟁론을 갖게된 데에는 의병 정신의 영향이 컸다. 윤봉길은 또한 천부인권론에 기초한 자유평등론을 펼쳤다. 자유평등론은 신분의 평등과 함께 민족의 평등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의식을 갖게 된 데에는 사회주의 이념까지 소개하였던 『개벽』지가 일정하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윤봉길이 유교 경전에서 충의정신을 배웠다면, 당시 혁신 잡지였던 『개벽』을 보면서 자유평등론을 깨칠 수 있었다. 윤봉길은 또한 독립은 누구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라면서 농민과 노동자 공동의 민중혁명론을 폈다. 그러나 윤봉길은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의 혁명사상을 수용한 것 같지는 않다. 윤봉길은 ‘계급 차별’보다는 ‘민족 차별’에 주목하였다. 윤봉길은 강한 민족 주체 의식의 소유자였다.

[상하이 의거의 영향과 의의]

일제의 폭압 통치하에서 민족의 자주독립이 농민의 계몽보다 절대적으로 우선한다는 것을 통감한 윤봉길은 망명의 길을 택하였으며, 혁명운동가가 되었다. 윤봉길은 청년들에게 총칼을 들고 나가 일제에 항쟁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자신이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일본의 천장절에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벌어진 전승축하식장에서 침략군인 일본군 수뇌부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는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일본의 상하이사변 전승을 무색하게 만들었으며,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정부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만주 지역에서는 만보산사건으로 맺혀 있던 반한감정이 풀어졌으며, 나아가 한중 연합작전이 전개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상하이의거는 한국의 청년들을 분기시켜 항일 전선에 나가게 하였을 뿐 아니라, 중국인에게도 항일 정신을 심어 주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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