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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1563
한자 忠孝烈
이칭/별칭 충신,효자,열녀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이해준

[정의]

충청남도 예산 지역에서 나라와 임금을 위해 힘쓴 충신, 삼강의 덕목을 잘 지킨 효자, 열녀를 통틀어 일컫는 말.

[개설]

충효열은 충신, 효자, 열녀를 일컫는 말로 삼강의 도리를 잘 지킨 이들을 가리킨다. 충신은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군위신강(君爲臣綱)의 예를 다한 신하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위기인 왜란과 호란 때 활약한 인물들이 충신 또는 공신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효자와 열녀는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의 도리에 모범을 보인 사람들이다. 삼강 가운데 효자는 부위자강(父爲子綱)에 열녀는 부위부강(夫爲婦綱)의 예를 다해야 한다. 조선은 나라를 다스리는 이념으로 성리학이 강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충효열은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었으며 양반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예산의 충효열 관련 기록]

예산군의 충효열과 관련한 인물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확인되는데 예산현 4건[효자 3건, 열녀 1건], 대흥현 5건[효자 2건, 열녀 3건], 덕산군 7건[충신 2건, 효자 4건, 열녀 1건]이 확인된다. 윤리서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효자도에는 예산현 3명, 덕산현 2명, 대흥현 2명, 열녀도에 예산현 1명, 대흥현 2명 등 10명이 등재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된 효자는 예산현의 이개우(李開祐)[1454년, 상물], 이천해 자 이개오[1464년, 정려, 복호, 서용], 방명[1535년, 상물, 복호], 열녀는 장중연의 딸 매읍덕[1503년, 정려, 복호]이고, 대흥현의 효자는 호장 이성만[1420년, 정려], 김순[1428년], 열녀는 박근 처 곽씨[1431년, 복호], 김영수 처 신씨[1535년, 상물, 복호], 박씨 자부 우씨[1739년, 정려]이며, 덕산군의 충신은 이의부[1701년, 추증, 사제], 이목[1701년, 정려], 효자는 김응신[1547년, 정문, 복호], 이덕채[1807년, 증직], 오명흡[1829년, 정려], 오명희[1831년, 정려], 열녀는 보덕[1528년, 상물] 등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효자도에는 대흥현 고려 이성만[성만수분(成萬守墳)], 예산현 조선 유학(幼學) 박충[박충여묘(朴忠廬墓)], 예산현 조선 향리 방맹[방맹려묘(方萌廬墓)], 예산현 조선 봉사(奉事) 이문경[문경거려(文卿居廬)], 대흥현 조선 유학 박원충[원충효우(元忠孝友)], 덕산현 조선 사노(私奴) 윤희(允熙), 풍이(風伊)[이자효성(二子誠孝)], 덕산현 조선 서인(庶人) 백춘복[춘복단지(春福斷指)]과 열녀도에 예산현 조선 호장 장중연(張仲淵) 여(女) 매읍덕(每邑德)[매읍덕단발(每邑德斷髮)], 대흥현 고려 박근 처 곽씨[곽씨려묘(郭氏廬墓)], 대흥현 조선 내노(內奴) 인홍 처 사비(私婢) 춘덕[춘덕수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지리지에도 충효열로 등재된 인물과 관련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예산현에 효자 2인, 열녀 1인, 대흥현에는 고려조에 효자 1인, 조선조에 열녀 1인이 나와 있다. 김근을 제외하고는 실록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읍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예산현에 17인[효자 12인, 열녀 5인], 덕산현에 30인[충신 5인, 효녀 17인, 열녀 8인], 대흥군에 17인[효자 11인, 열녀 6인]이 기록되어 있다. 덕산현의 경우 충효열을 구분하여 기록한 것은 아니나 행적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여지도서』에 충효열의 포장 내용을 살펴보면 예산현의 경우 15건[정려 10건, 증직 1건, 가자 1건, 제직 1건, 향천 2건]이 기록되어 있고 덕산현의 경우 33건[정려 17건, 증직 10건, 복호 6건], 대흥군의 경우 17건[정려 12건, 증직 1건, 복호 4건]이 적혀 있다.

영조~헌종 연간의 기록인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는 대흥현지는 없지만 「예산현지」와 「덕산현지」에 충효열이 수록되어 있다. 「예산현지」에는 15인[효자 11인, 효부 1인, 열녀 4인]이 기록되어 있고 「덕산현지」에는 충효열 구분 없이 41인이 수록되어 있다. 1871년 기록된 『호서읍지』에는 예산, 덕산, 대흥 모두 수록되어 있다. 「예산현읍지」와 「덕산군지」의 충효열 인물은 『충청도읍지』와 내용이 같다. 「대흥군지」에는 효자 12인, 효부 2인, 열녀 6인이 기록되어 있다. 1895년에 나온 『(호서)읍지』에는 「덕산현지」가 수록되어 있으나 인물조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충효열의 사례 가운데 정려의 기록까지 남아있는 것은 모두 49건이다. 유적과 기록을 통한 예산의 충효열은 현재는 남아있는 36건의 정려를 통해 알 수 있다. 대흥현의 충효열은 총 13건으로 효자 10건, 열녀 3건이다. 덕산현의 충효열은 총 15건으로 충신 2건, 열녀 2건, 효자 9건, 효열부 2건이다. 예산현의 충효열은 총 7건으로 효자 4건, 효열부 1건, 열녀 2건이다.

[예산의 대표적인 충효열]

1. 충신

충신으로는 한순이억(李檍)[1615~1636]이 있다. 한순은 덕산 사람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한(士閑)이며 충훈부도사 한극심의 아들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 선전관, 평양판관 등을 거쳐 1590년(선조 23) 남평현감에 임명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월에 윤열(尹悅) 및 창평현감과 합세, 군사를 거느리고 송현에 진군하여 전투하다 순국하였다. 효종 때 병조참의로 추증되었다가 1713년(숙종 39)에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증직되고, 서성군에 봉해졌다. 효종대 재상 김육과 김육의 손자 김석주의 건의로 정려가 건립되어 현전한다.

이억은 덕산 사람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여량(汝樑)으로 현감(縣監) 이석립(李碩立)의 아들이다. 22세 때 병자호란에 충청도 병마절도사인 이의배 지휘 하에 전투에 참여했고 광주 쌍령에서 적을 만나 싸우다 전사하였다. 1702년(숙종 28) 아들인 “전 참봉 이경창(李慶昌)이 상언(上言)하여 예조에 정려와 증직을 청하였는데 윤허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1702년 명정을 받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2. 열녀

예산군에 열녀 7건, 효열부 3건의 정려가 현전한다. 대표적인 열녀로 박근 처 현풍곽씨와 영조의 차녀이자 조선 왕실 내 유일한 열녀인 화순옹주를 들 수 있다. 박근 처 현풍곽씨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동국삼강행실도(東國三綱行實圖)』에 모두 열녀로 기록되어 있다. 박근 처 현풍곽씨는 고려시대 인물인데 조선 초기 세종 때 복호와 명정이 이루어진다. 『세종실록(世宗實錄)』 1431년(세종 13)의 기록에 의하면 현풍곽씨는 남편 박근(朴根)이 죽은 후에도 시부모를 모신 열행이 있었다. 예조에서 곽씨(郭氏)의 포상 여부를 확인하여 복호(復戶)[조선 시대에 충신·효자·군인 등 특정한 대상자에게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하여 주던 일]하도록 보고하였으나, 정려비에는 1430년(세종 12)에 명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시기에 차이가 있다.

화순옹주는 예산에 원찰을 둔 월성위 김한신의 처이다. 1758년(영조 34) 남편인 김한신이 죽자 화순옹주는 곡기를 끊어 월성위의 뒤를 따르는 열행을 보였다.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1783년(정조 7) 정조의 명으로 열녀문을 세웠다. 화순옹주의 열녀문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다.

3. 효자

예산군은 충효열 가운데 대부분 효자의 기록이다. 예산현, 대흥현, 덕산현으로 대표적인 효자를 살펴보겠다. 대흥현에는 이성만·이순목 형제가 대표적인 효자이다. 둘은 원래 고려 말의 인물로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고, 부모가 돌아가시자 형은 어미의 무덤을, 아우는 아비의 무덤을 지켰다. 아침에는 형이 아우의 집에,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에 가서 조석으로 함께 이바지할 음식을 바치고 맛있는 것을 한 가지라도 얻게 되면 반드시 함께 먹었다. 그리하여 효자 대흥 호장 이성만과 이순목을 왕이 불러들이고 마을에 정문을 내려, 1497년에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덕산현의 대표적인 효자로는 신효(申皛)[1584~1660]가 있다. 신효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이(白而)이며 사육신 사건(死六臣事件)에 연루되어 면천(沔川)으로 유배되었던 신숙서(申叔胥)의 5대 손이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머니가 병이 들자 부인 박씨와 함께 단지하여 소생시켰다고 하며, 부인의 효행도 함께 알려져 1630년(인조 8) 명정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정려가 남아 있다.

예산현에는 한씨 집안에 효자·효부·열녀가 함께 명정된 사례가 있다. 한경침은 한명회(韓明澮)[1415~1487]의 손자로 공신옹주와 결혼했다. 갑자사화로 폐서인이 되어 유배지로 떠나자 공신옹주가 남편의 신주를 품고 가 숨겨 두고 정성껏 모셨다고 한다. 중종반정 뒤에 그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1507년(중종 2) 6월 6일에 명정하였고, 1507년 12월에 절부정려가 세워졌다. 한신묵은 병든 어머니를 겨울철에 수박이나 잉어를 구해다 드리는 등 정성을 다해 모셨다. 이러한 효행을 인정 받아 교관이 증직되었고, 한재인의 동생 한재건의 처 경주김씨의 열행도 인정받아 두 사람 모두 1884년(고종 21)에 명정을 받았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충효열은 예산 지역의 유교문화와 의식, 정신사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충효열 인물들 덕분에 역사서의 기록과 유적을 통하여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예산 지역이 그 지명에 걸맞는, 그리고 다른 지역과 차별성이 있는 유교문화적 전통과 지속적인 인물 배출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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