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1016
한자 佛敎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용혁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활동하는 석가모니 부처를 교조로 하는 종교.

[개설]

예산의 불교는 백제 이래 내포 지역의 중요한 불교의 거점으로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발전해 왔다.

[고대]

예산 불교는 내포 지역 불교문화의 중심이라는 전통을 이어 왔다. 백제시대 수덕사의 창사, 봉산면 화전리의 백제시대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보물 제794호], 예산 교촌리 출토 금동보살입상, 백제 무왕 대 혜현의 법화경 강론 등이 예산의 불교적 전통이 초기 불교에서 이미 큰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동시에 조계종 제7교구 본산이며 ‘수덕총림’으로 자리한 수덕사의 존재는 고대에서 시작된 그 전통이 현재까지 계승된 것을 잘 보여 준다. 수덕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절로서 지금까지 그 법등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절이기도 하다. 이 같은 고대 예산의 불교적 역량이 660년 사비 수도 함락 이후 4년에 걸치는 백제부흥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예산에서 백제 불교의 전통은 이후에도 그 면모가 지속되었다. 불교가 크게 진흥되었던 고려시대 예산의 중심 가람은 수덕사 부근의 가야사였다. 가야사가 중심 사찰로 등장하는 것은 가야산의 존재와 관련이 깊다. 가야사는 고대 이래 내포 지역의 중심 공간으로서 특별히 신성시하던 국가적 제사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려시대 가야산 일대에는 가야사 이외에도 서림사(西林寺), 용연사(龍淵寺), 수암사(水菴寺), 운암사(雲菴寺) 등 대단히 많은 수의 절과 암자가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 중심은 역시 가야사였다. 수덕사가 위치한 덕숭산가야산의 줄기이며, 예산 삽교읍 석조보살입상[보물 제 508호]의 존재도 결국 가야산이 갖는 지리적 배경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14세기 수덕사의 중창, 1308년 대웅전의 건축은 가야사의 번창에도 불구하고 수덕사의 법맥이 여전히 활발히 계승되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신앙층이 어느 시기보다 두터웠기 때문에 가야산 주변 이외에도 예산 지역 곳곳에 규모 있는 사원들이 입지하였다. 대표적인 절은 예산현 치소 부근의 향천사(香泉寺), 대흥 지역의 대련사(大蓮寺)이다. 안락사(安樂寺), 관정사(觀正寺), 혹은 대흥 지역의 용흥사(龍興寺), 보광사(普光寺), 은사(銀寺) 등의 절 이름도 기록에 보인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어느 곳과 같이 예산도 불교가 크게 위축된다. 가야사는 특히 고려시대 내포 지역의 최대 사찰이었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절의 세력이 기울고, 대원군에 의하여 폐사되는 운명이 되었으나 그 넓은 절터만은 지금도 남아 있다. 가야사터를 내려다보는 언덕, 원래 가야사의 금탑(金塔)이 있었다는 자리에는 대원군이 만든 아버지 남연군의 묘[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가 있다. 가야사지 부근의 보덕사가야사 폐사 후 대원군에 의하여 지어진 절이다. 화암사추사 김정희 집안의 원찰 성격의 절로 유명하다.

[근대 이후]

조선시대 이래 위축되었던 예산의 불교는 경허(鏡虛)[1846~1912]와 만공(滿空)[1871~1946]의 노력에 의하여 근대에 새로운 면모를 보이게 된다. 경허는 충청남도 일대에서 많은 절에 주석하면서 약화된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시켰다. 경허의 문하인 만공은 간화선(看話禪) 중심의 한국 불교계를 중흥시킨 대표 인물이다. 1905년 무렵부터 1933년 수덕사를 대대적으로 새로 중창하여 한국 근대 불교에 새로운 선풍을 일으켰다. 또한 만공 문하의 법맥은 이후 한국 불교의 활력을 회복하는 커다란 구심점이 되었다.

1962년 수덕사는 50여 개 말사를 거느린 조계종 제7교구의 본산이 되었다. 내포 불교의 거점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된 것이다. 예산군에는 수덕사 이외에 향천사, 대련사, 청정암, 만월사, 양각사, 마하원, 탈해사, 관음암 등의 사찰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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