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083
한자 浦口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원회

[정의]

조선 후기와 근대 충청도 예산 지역의 배가 드나들던 시설.

[개설]

포구란 강이나 냇가 또는 바닷목에 배가 접안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을 말한다. 예산군 일대에 있는 포구의 입지와 변천은 ‘덕산 일대의 포구와 장시’ 및 ‘삽교천 일대의 포구’의 두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덕산 일대의 포구와 장시]

내포 지역은 한양으로 조운이 연결되고 수도를 방어하는 중요한 길목에 있었다. 덕산의 구만포(九萬浦) 역시 영향력 있는 포구였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에는 덕산현 도용면이었는데, 지금은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에 속한다. 구만포삽교천을 따라 형성된 평야지대에서 생산되는 곡물이 모여, 선박을 통해 타 지역으로 나가는 내륙 거점의 포구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개항 이후에는 청나라 상인의 충청남도 내지 상업 활동의 거점 포구로서 서양목, 중국 비단, 잡화 등이 들어오고 많은 곡물이 반출되기도 하였다. 구만포는 1868년 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남연군묘를 도굴하기 위해 덕산에 왔을 때 배에서 내린 포구로도 유명하다.

삽교천 유역에는 예산, 덕산, 면천, 대흥, 신창의 장시가 연결되고 있었다. 또한, 면천 지역의 홍주 월경지에 있었던 거산장[지금의 당진시 신평면 거산리]과 예전장[지금의 당진시 신평면 상오리] 2곳을 포함하면 삽교천 유역의 장시는 20여 개에 이르렀다. 이 중 삽교천 유역의 예산, 덕산, 대흥, 면천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부터 농업 생산기술이 발전하였으며, 간척사업으로 경작지가 확대되었다. 여기에 삽교천을 오르내리는 선박에서 해산물이 풍부하게 공급되었다.

이로 인해 예산은 정치·군사의 중심지 홍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내포 지역 경제의 핵심지가 되었다. 예산 지역에서는 유궁포(由宮浦), 구만포와 연관하여 농수산물은 물론 담배, 목면, 대마, 호마 등의 특수작물과 복령, 목탄, 석탄 등의 임·광산물 등이 거래되었고, 예산의 권역을 넘어 다른 지역과의 연계가 이루어졌다. 또한, 예산 시장의 성장은 보령 옹암포(甕巖浦)에 인접한 광천장(廣川場)이 발전하면서, 홍주군과 결성군의 원격 유통이 가야산 서쪽으로 형성되었던 것도 관련이 있었다. 즉, 가야산 동쪽의 예산, 덕산, 대흥, 면천이 가야산 서쪽 지역보다 장시가 밀접히 연결되면서 경제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개항 이후에도 예산은 보부상 활동의 중심지로서 차령산맥 서쪽 지역 상업의 거점 역할을 했다. 이에, 예산은 1909년 공주를 앞질러 강경, 대전에 이어 상업세를 많이 거두는 유력한 시장이 되었다. 예산은 금융 차원에서도 공주에 필적할 수 있는 충청남도 제2의 도시로 두각을 나타냈다. 1913년에 예산의 자본가와 실업가들이 최초의 민족계 지방은행인 호서은행을 설립하였다. 호서은행의 영업 범위는 내포 지역 전역을 넘어 공주까지 미쳤다. 이어 1917년 5월에는 광천, 1918년 10월에는 천안에 지점을 개설하였다. 또한, 예산에 방계회사로 충남상사주식회사를 설립했고, 1928년에는 충남제사공장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호서은행은 1930년 총독부의 민족계 은행 통합 정책으로 한성은행과 대등한 조건으로 합병함으로써 해산되었다.

[삽교천 일대의 포구]

아산만과 삽교천 연변에 위치한 당진, 면천, 아산, 예산, 덕산 등 내포 지방은 수로 교통의 요지로 물산이 집산하던 곳이었으며, 경창으로 실어 나르던 조세미의 집산지로 포구가 발달되었다. 내포 지방은 거대한 농경지가 배후에 있고, 아산만이 육지 쪽으로 쑥 들어갔을 뿐 아니라 아산만에 연결되는 삽교천이 내포평야 한가운데를 깊숙이 흐르고 있어 수상교통이 매우 편리하므로 이른 시기부터 주민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삽교천 주변은 실제로 예로부터 어염시수(魚鹽柴水)[생선·소금·땔나무·물이라는 뜻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이르는 말]가 풍부하고, 포구가 발달되어 수운이 편리하여 한양과의 교류가 빈번하였다. 1770년(영조 46)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는 전국의 장시를 체계적으로 조사, 수록하고 있는데, 이 시기의 내포에는 약 43개의 장시가 있었으며, 주로 당진, 예산, 홍성 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농업 생산성이 높았던 내포 지역이 아산만으로 연결되는 삽교천, 무한천 하천 수로의 포구를 중심으로 곡물, 어염시수의 교류가 활발하여 장시가 집중적으로 발달되었다.

포구는 내포 문화권의 육로와 수로를 이어주는 스위칭 허브(switching hub)로서의 핵심 공간이다. 내포 지방은 삽교천방조제, 석문방조제 공사로 하천 입구가 모두 차단되어 현재는 포구의 흔적을 찾기도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 자료에서 포구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내포 지역은 삽교천과 역천이 모두 감조하천(感潮河川)으로 직접 최하류가 아산만과 통하기에 일찍부터 뱃길이 내륙 깊숙이 뻗어 수운로를 잘 이용하고 있었다. 전근대 시대에 수계(水系)는 길을 이어주고, 산계(山系)는 길을 끊어 놓는다.

충청도 지역에서 생산된 물산은 육로와 수로 그리고 해로라는 세 가지 시스템으로 왕도까지 운반되었다. 내포 지방의 곡창에서 생산된 곡물은 삽교천 연안에 설치된 조창이 있는 포구를 통하여 수납되어 서울로 운송되었기에 각 포구에는 선박의 왕래가 많고 물자가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삽교천 연변은 예로부터 주변에 곡창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고, 수상, 해상교통이 편리하여 세곡의 운송을 위한 조운의 출발지로서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부터 포구가 발달하였다. 강변에는 수운창(水運倉), 해변에는 해창(海倉)을 두었다.

삽교천 연변에는 상류[지류인 무한천 상류]에 이섭포(利涉浦), 삽교천의 중간에 풍해포(豊海浦), 삽교천 최하류 아산만과 만나는 곳에 회해포(懷海浦)가 연속으로 체계적으로 입지하여 주변 일대의 군현 조세미를 수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려 말, 공양왕 때에는 장포(獐浦) 포구에 당성(溏城)을 쌓고 서울로 조운한 사실이 있는데, 장포는 이섭포와 풍해포의 중간인 무한천삽교천이 만나는 꼭지 지점에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지천의 토사 퇴적으로 포구 위치가 아산만 밖으로 이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범근내포(犯斤乃浦)에서 공세포(貢稅浦)로의 이전이다.

특히, 조선시대 삽교천에는 편리한 수운 교통을 이용하여 곳곳에 포구가 많이 발달되었다. 삽교천 연변에 있는 포구들은 원래 조운이 주 기능이었지만 후에는 장삿배들이 찾아와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어염시수가 서로 교환되었다.

포구가 삽교천변에 이와 같이 많았다는 것은 수운 교통량의 증가, 물자 유통의 확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당시 내포 지역이 생기 넘치는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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