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군읍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099
한자 大興郡邑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문헌/전적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조민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편찬 시기/일시 1681년(숙종 7) 이후 - 『대흥군읍지』 편찬 추정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성격 지리지
권책 1책 9장
규격 30.1㎝[세로]|가로 21.1㎝[가로]
권수제 대흥군읍지(大興郡邑誌)

[정의]

조선 후기에 편찬된 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지역인 충청도 대흥군의 읍지.

[개설]

『대흥군읍지』에는 대흥군 소속 여러 면리의 이름과 위치, 지역의 역사, 거주 성씨와 풍속, 산과 하천 등 자연환경, 공해 등 행정시설, 교육시설, 제언 등 민생 시설, 지역 인물 관련 정보 등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편찬/간행 경위]

편찬 시기에 관한 단서는 첫 번째, 건치연혁(建置沿革) 항목에 기재된 정보이다. 건치연혁에 따르면 ‘금상 신유년(今上辛酉年)’에 현종의 태실(胎室)을 다시 봉축하고 군으로 승격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종의 태실을 다시 봉축한 해는 숙종 대인 1681년(숙종 7)이다. 따라서 『대흥군읍지』는 숙종 재위 기간 중에서도 1681년 이후 편찬된 것이다. 두 번째 단서는 『대흥군읍지』에서 대흥군에 재임했던 지방관들의 정보를 수록하고 있는 관안(官案) 항목의 마지막 인물 윤식(尹寔)이다. 윤식이 활동한 시기는 숙종 대이다. 이 두 가지 단서를 감안했을 때 『대흥군읍지』는숙종 연간에 편찬된 읍지라고 할 수 있고, 더 구체적으로는 ‘금상 신유년’인 1681년 이후로 추정된다.

[형태/서지]

『대흥군읍지』는 필사본이고, 1책 9장으로 되어 있으며, 지도는 첨부되어 있지 않다. 세로 30.1㎝, 가로 21.1㎝ 크기이다.

[구성/내용]

표제 ‘대흥군읍지 전(大興郡邑誌 全)’, 내제는 ‘대흥군읍지(大興郡邑誌)’이다. 항목 구성은 강계(疆界), 건치연혁, 군명(郡名), 관원, 성씨, 형승(形勝), 풍속, 산천, 토산(土産), 성곽(城郭), 학교, 사묘(祠廟), 총묘(塚墓), 고적(古蹟), 제언(堤堰), 관우(館宇), 불우(佛宇), 인물, 효자, 열녀, 문과, 무과, 음사(蔭仕), 교량(橋梁), 누정(樓亭), 관안(官案), 호액(戶額), 전안(田案), 재곡(財穀), 공안(貢案), 부안(賦案), 이안(吏案), 병안(兵案)으로 되어 있다.

『대흥군읍지』에는 대흥군 소속 여러 면리의 이름과 위치, 지역의 역사, 거주 성씨와 풍속, 산과 하천 등 자연환경, 공해 등 행정시설, 교육시설, 제언 등 민생 시설, 지역 인물 관련 정보 등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대흥군읍지』에 기록된 호구[2,693호, 인구 1만 1296명]와 전결의 수로 미루어 볼 때 대흥은 조선시대에 비교적 작은 규모의 읍세를 지닌 고을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대흥군은 동쪽으로 공주(公州)까지 30리[약 11.78㎞], 남쪽으로 청양(靑陽)까지 22리[약 8.64㎞], 서쪽으로 홍주(洪州)까지 9리[약 3.53㎞], 북쪽으로 예산(禮山)까지 19리[약 7.46㎞] 떨어진 위치에 있었고, 서울까지 323리[약 126.85㎞의 거리에 있었다.

[의의와 평가]

『대흥군읍지』는 다양한 항목을 설정하여 조선 후기 17~8세기 대흥 지역의 사회, 경제, 문화적 면모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대흥군읍지』의 이전, 이후 시기에 편찬된 대흥 지역 읍지들과의 비교 분석을 통해 조선시대 대흥 지역의 사회, 문화적 변화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