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의 예산 행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333
한자 太祖王建-禮山行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윤용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934년 5월 6일연표보기 - 태조 왕건의 예산 행차
발생|시작 장소 예산산성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산성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예산산성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산성리 지도보기

[정의]

934년 5월 6일 태조 왕건이 예산진을 직접 방문하고 대민 교서를 발표한 사건.

[역사적 배경]

918년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통일신라를 통합하고 후백제를 무너뜨려 936년(태조 19)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고려의 통일은 실질적인 민족의 통합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사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고려 초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제압하는 통일 전쟁의 행보를 하는 과정에서 내포 지역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현장으로 부각되었고, 예산은 중요한 교두보였다. 건국 이듬해인 919년(태조 2) 8월, 오산현(烏山縣)예산현(禮山縣)으로 이름하고 애선(哀宣)과 홍유(洪儒)를 파견, 예산 지역 유민(流民) 500여 호를 다시 모아 살게 하였다.

925년 10월 고려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유금필(庾黔弼)은 예산의 임존성을 공격, 함락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죽이고 포로로 잡은 자가 도합 3,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전투가 치열하였다고 한다. 내포 지역에 대한 지배력 확보는 후백제와의 경쟁에서 승패를 가르는 관건이었기 때문에 이처럼 예산 지역은 교두보로서 중시되었다.

[경과]

934년(태조 17) 5월 6일[양력 6월 20일], 예산진(禮山鎭)에 행차한 태조 왕건은 여기에서 “죄 있는 자는 벌이 자손에게 미칠 것이며 공이 많고 죄가 작으면 상벌을 헤아려 행할 것이다.”라고 하는 대민 교서를 발표하였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2년을 앞둔 시점이다. 태조의 대민 교서는 오랫동안 전란과 노역, 가혹한 세금으로 고통 아래 있었던 백성들에게 새 시대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결과]

예산진에서 교서를 발표한 후 태조 왕건은 홍주를 쳐서 완전히 그 지배하에 두었다. 홍주 공략은 2년 후 936년 후백제를 제압하고 삼한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는 기초가 되었다. 태조 왕건이 행차한 예산진의 현장은 예산산성[무한산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후삼국 통일을 눈앞에 둔 태조 왕건이 예산에서 대민 교서를 발표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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