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제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343
한자 軍事制度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곽호제

[정의]

조선시대 충청남도 예산 지역의 외세 침입이나 변란에 대비한 방위 체제.

[개설]

예산 지역에 해당하는 예산현·대흥현·덕산현의 군사 체계는 조선 초기 진관체제에서 홍주진관에 속해 있었고, 현감이 겸임한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가 관리하였다. 외세 침입이나 변란에 대비한 방어시설로 읍성(邑城)을 비롯한 성곽이 있었음을 조선시대의 지리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역사적 배경]

조선 전기 지방 육군의 중심은 병영(兵營)이었다. 충청병영은 공민왕 때 최영(崔瑩)의 건의로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로 이산현(伊山縣)[현재의 덕산]에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설치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1393년(태조 2)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다시 1416년(태종 16) 해미로 옮겨가게 되었다. 1651년(효종 2) 임진왜란을 계기로 충청도 내륙 방어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도적 체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청주(淸州)로 다시 옮겨갈 때까지 230여 년간 해미에 충청병영이 존속하였다.

[경과]

조선 초기의 지방 군사 제도는 진(鎭)이 국방을 담당하는 방위체제[鎭管體制]였다. 진관체제는 평상시에는 진관(鎭管)이 중심이 되어 훈련과 병기의 점검 등을 담당하고, 유사시에는 각각의 진관이 소속 군병을 정돈시킨 다음 주장(主將)의 명령을 받아 방어를 담당함으로써 비록 한 진관이 무너지더라도 다른 진관이 적을 공격하거나 적의 진격을 막음으로써 빠른 속도로 넓은 지역에 적이 진출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전술이었다. 그 결과 도절제사가 지휘하는 영(營)과 첨절제사가 지휘하는 진(鎭), 즉 영진군(營鎭軍)이 정비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조선 전기의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의 위치 및 군사지휘관에 대하여 수록되어 있는데, 충청도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충청도 육군의 진관체제에서 최상부에 해당되는 주진은 해미와 충주 등 2곳이었다. 해미에는 별도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종2품]가 파견되었고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우후(虞候)[종3품]가 있었으며, 충주에는 관찰사로 하여금 병마절도사를 겸임하게 하여 별도로 파견된 병마절도사의 군권 독점을 견제하려 하였다. 주진의 지휘를 받으면서 제진을 통제하였던 거진은 충주진관, 청주진관, 공주진관, 홍주진관 등 4곳이 있었으며 목사가 최고지휘관인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종3품]를 겸임하였다.

충주진관 소속의 제진은 군수가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종4품]를 겸임한 청풍, 단양, 괴산을 비롯하여, 판관이나 현감이 병마절제도위[종6품]를 겸임한 충주[판관], 연풍[이하 현감], 음성, 영춘, 제천 등이 있었다.

청주진관 소속의 제진은 군수가 병마동첨절제사를 겸임한 천안, 옥천을 비롯하여, 판관이나 현령·현감이 병마절제도위[종6품]를 겸임한 청주[판관], 문의[현령], 직산[이하 현감], 목천, 회인, 청안, 진천, 보은, 영동, 황간, 청산 등이 있었다. 공주진관 소속의 제진은 군수가 병마동첨절제사를 겸임한 임천, 한산을 비롯하여, 판관이나 현감이 병마절제도위[종6품]를 겸임한 공주[판관], 전의[이하 현감], 정산, 은진, 회덕, 진령, 연산, 이산, 부여, 석성, 연기 등이 있었다. 홍주진관 소속의 제진은 군수가 병마동첨절제사를 겸임한 서천, 서산, 태안, 온양을 비롯하여, 판관이나 현감이 병마절제도위[종6품]를 겸임한 홍주[판관], 평택[이하 현감], 홍산, 덕산, 청양, 대흥, 비인, 결성, 남포, 보령, 아산, 신창, 예산, 해미, 당진 등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기록된 예산 지역 병력 수는 예산현에 시위군(侍衛軍) 18명, 진군(鎭軍) 27명, 선군(船軍) 156명, 덕산현에 시위군 20명, 진군 230명, 선군 87명, 대흥현에 시위군 11명, 진군 89명, 선군 100명이 있었다.

조선 초기의 진관체제는 군사 지휘관을 겸임한 수령이 병법이나 무재 등이 부족한 경우 유사시에 군사를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고, 적의 대규모 침입이나 상습적인 침입이 있을 경우 각각의 진관을 방어하는 진관체제와는 달리 병력을 집중시켜 특정 지역을 방어할 필요성이 요청되었다. 따라서 삼포왜란(三浦倭亂)·을묘왜변(乙卯倭變) 등 대규모 왜구의 침입을 경험하면서 특정 지역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중앙에서 군사 지휘관을 파견하여 전투를 지휘하게 하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이 유사시 전술로 새롭게 채택되었다. 1651년(효종 2) 충청병영이 청주로 이전되면서 홍주[前營]·해미[左營]·청주[中營]·공주[右營]·충주[後營]의 충청도 5진영 체제가 확립되었다.

조선 후기의 지방군은 기본적으로 조선 전기의 진관체제를 복구한 위에 새로이 속오군이 등장하고, 그 훈련을 위해 영장(營將) 제도가 실시되어 지방 수령들이 가지고 있던 군사권을 행정권에서 독립시켰다.

내포 지역은 서쪽 방향으로 바다와 접한 지역이 많기 때문에 외세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이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적인 편제와 시설도 주로 해안에 집중되었다. 내포의 고을에는 유사시의 고을 방어를 목적으로 읍성(邑城)을 축조하였다. 조선시대의 역대 지리지에 예산 지역의 성곽에 대하여 수록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관련 사료]

예산현의 읍성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홍주목 예산현조에 무한산성(無限山城)이 석성(石城)으로 위치와 규모, 특징 등과 함께 수록되었다. 성의 둘레는 2,002척이며 성내에 우물 하나가 있다. 무한천변의 오른쪽에 위치하여 내륙의 예산현으로 진격하는 외세를 방어할 수 있는 요지에 축조되어 있다. 무한산성은 조선 초기까지 있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이후의 지리지에는 '금폐(今廢)'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16세기 이후 성의 역할이 상실된 것으로 보인다.

대흥현덕산현에는 석성으로 축조된 읍성이 있었음을 대부분의 지리지에서 기록하였다. 읍성 이외에 대흥현에는 임존성(任存城)[『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는 봉수산고성(鳳首山古城)으로 기록]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이곳에서 660년(무열왕 7) 백제 좌평(佐平) 정무(正武)가 당에 대항하여 저항했던 사실과 925년(고려 태조 8) 유검필(庚黔弼)이 후백제를 공격했던 사실을, 『여도비지(輿圖備志)』 에는 1236년(고종 23) 대흥성[현 임존성]을 공격하던 몽고를 격파했던 사실과 임진왜란 때(1594년) 이몽학이 공격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충청도읍지』에서 덕산현에는 고려 말 최영의 건의로 이산진(伊山鎭)에 도절제사영을 설치하였다가 태종 때 해미로 옮겨 간 사실과 가야산고성이 있었던 사실을, 『여도비지』에서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으로 입었던 피해와 왜구를 격퇴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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