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종의 예산 행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348
한자 朝鮮太宗-禮山行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문경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416년 2월 7일연표보기 - 조선 태종의 예산 행차 태종과 충녕대군이 덕산현에서 묵고 순성으로 향함
종결 시기/일시 1416년 2월 17일연표보기 - 조선 태종의 예산 행차 태종과 충녕대군이 무한성에서 묵고 한양으로 향함
성격 사건

[정의]

1416년 2월에 조선 태종과 충녕대군이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지역에 행차한 사건.

[개설]

1416년(태종 16) 2월, 태종은 순성[지금의 충청남도 태안]에 운하를 굴착하는 일을 결정짓기 위해 순성을 강무소(講武所)로 삼아 순행에 나섰다. 2월 4일에 한양을 떠난 태종은 2월 7일 덕풍현(德豊縣)[지금의 예산군 덕산면]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지냈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인 2월 17일에 예산현의 무한성(無限城) [지금의 예산군 예산읍 산성리 소재]에서 묶었다. 이때 훗날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도 함께 호종하였다.

[역사적 배경]

예로부터 태안의 안흥량은 서해 바닷길 중 가장 험한 곳이었다. 따라서 조운이 시작된 고려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안흥량을 지나는 조운선이 침몰하는 일이 많았다. 이에 태종은 하륜의 건의를 수용하여 안흥량을 피하는 방안으로 천수만과 가로림만 사이에 운하를 건설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충청도관찰사 이안우(李安愚)가 반대하고, 현지를 답사하고 돌아온 박자청(朴子靑) 등이 애매하게 답변하자 운하 건설 여부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강무를 구실로 태안에 행차하였다.

[경과]

1416년 2월 4일에 한양을 떠난 태종은 2월 5일에 충청도 직산 흥경원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온창[지금의 충청남도 온양]의 인군원평(仁君院坪)에서 묵었다. 2월 6일에는 내시별감(內侍別監)을 보내어 가야산 신에게 제사지냈으며, 7일에 덕산현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지냈다. 태종덕산현에 머무르니, 전라도관찰사 권진(權軫)이 사람을 보내어 말 1필을 바쳤다.

1416년 2월 12일에 순성에 도착한 태종 일행은 내외 이작지산(伊作只山)에서 사냥을 하였다. 이때 내관(內官) 황도(黃稻)와 사재감정(司宰監正) 조서로(趙瑞老) 등을 보내어 순제(蓴堤)에 운하[渠]를 파는 것이 편한지 여부를 살펴보게 하였다. 강무를 마친 태종은 돌아오는 길에 예산 무한성 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이때 태종은 유습(柳濕)에게 내구마(內廐馬) 1필을 내려 주었으며, 중관(中官)을 홍주(洪州)로 보내어 왕자의 난으로 홍주에 귀양 와 있던 형 이방간(李芳幹)에게 술과 고기를 내렸다.

[결과]

순성에 강무를 다녀온 태종은 내포 일대가 군사적·지리적 요충지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1416년 12월 2일에 명을 내려 태안에 읍성을 쌓게 하고, 이산에 있었던 병영을 해미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본래 병영으로 사용하던 이산의 구영(舊營)은 예산의 청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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