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흥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353
한자 日興驛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오가면 역탑리
시대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 조선 후기
집필자 곽호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준공 시기/일시 고려시대 - 일흥역 설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6년 1월연표보기 - 일흥역 폐지
최초 설립지 일흥역 - 충청남도 예산군 오가면 역탑리 지도보기

[정의]

고려와 조선시대에 현재의 충청남도 예산군 오가면 역탑리 지역에 설치되었던 역.

[개설]

일흥역(日興驛)예산현 오원리면(吾元里面) 역리(驛里)[현재 예산군 오가면 역탑리]에 있었다. 충청도 서부 지역으로 연결되는 곳에 있었고, 공문의 전달과 사신 및 관리의 여행에 마필(馬匹)을 제공하고 군정을 보고하던 곳이다.

[건립 경위]

역(驛)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공문의 전달과 사신 및 관리의 여행에 마필(馬匹)을 제공하고 변방의 군정을 보고하던 곳으로,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원(院)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역원(驛院)이라 통칭되었다. 역도(驛道)는 도로의 상태와 중요도 및 산천의 거리에 따라 여러 개의 역을 묶어 찰방(察訪)[종6품]이나 역승(驛丞)[종9품]의 지휘 감독 아래 순행(巡行)·고찰(考察)하면서 역을 관리하는 체계이다. 전국의 각 역에는 찰방, 역승의 관장 하에 역장(驛長)·역리(驛吏)·역졸(驛卒) 등을 두어 역정(驛政)의 관리와 공역을 맡게 하였다.

[변천]

『고려사(高麗史)』 권82, 병지(兵志) 참역(站驛)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 전국에 22개 역도(驛道)를 설치하였고, 일흥역은 그중 하나인 충청주도(忠淸州道)에서 관할하는 34개 역 중의 한 곳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설치되었던 일흥역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세종 때 시흥도(時興道)에 소속된 4역(昌德, 日興, 長時, 花川) 중 한 곳으로 역승의 관할 하[監牧官一人 驛丞九人 ‥‥ 時興道所管驛四 昌德, 日興, 長時, 花川]에 있었다. 숙종 연간에 간행된 『전록통고(典錄通考)』에 충청도의 시흥도 소속으로 일흥역이 기록되어 있으나, 1757년(영조 33)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일흥역금정도 소속으로 기록되어 있다. 1700년을 지나면서 시흥도가 폐지되고 시흥도 소속의 8역이 금정도 소속의 9역과 함께 금정도 찰방의 관할로 통합된 것이다.

당시에 일흥역이 있었던 예산현 오원리면(吾元里面) 역리(驛里)에는 99호에 남자 160명, 여자 130명이 거주하였다.

[구성]

『여지도서』 충청도 예산현 역원조에 "일흥역이 현[예산] 서쪽 15리[약 5.89㎞]에 있으며 금정도 소속이다. 역리 81명이 있으며, 노(奴) 45명, 비(婢) 2명이 있다. 역마(驛馬) 10필 내에 상등마(上等馬) 2필, 중등마 4필, 하등마 4필이 있다[日興驛 在縣西十五里 金井所屬 驛吏八十一名 奴四十五 婢二名 驛馬十匹內 上等二匹 中等四 下等四匹].”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황]

일흥역은 근대화 과정에서 정치·사회제도가 변화하고, 교통이 발달하면서 폐지되었다. 즉, 1896년(건양 1) 1월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일흥역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일흥역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지방의 공무수행 관리에 역마 및 숙박 편의 제공과 중앙과 지방의 연락 업무를 목적으로 현재 예산군 오가면 역탑리에 설치되었던 교통·통신제도이다. 국가경영상 중요한 기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품계가 높지 않은 찰방[종6품]과 역승[종9픔]의 관할 아래 있었고 역제(驛制) 운영상 폐단이 많아지면서 편제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현재 ‘역’ 자가 ‘역말’, ‘역촌’, ‘역탑리’ 등의 지역 명칭으로 사용되는 곳이 그 기능을 하였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을 뿐 그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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