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보군 유회 활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374
한자 民保軍儒會活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문경호

[정의]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충청남도 예산군 지역에서 양반 지배층이 동학 농민군에게 대항하기 위해 전개한 활동.

[개설]

동학농민들의 2차 봉기가 일어나자 농민들은 자신들을 괴롭혔던 양반 지주나 주인을 끌어내어 벌주고 그 재산을 빼앗거나 집을 불지르고 족보와 토지문서·노비문서 등을 소각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불안해 하던 양반들은 돈과 식량을 모아 유회군(儒會軍) 또는 민보군(民堡軍)을 조직하여 관군·일본군과 함께 동학군을 공격하였다.

[역사적 배경]

동학 농민군 중에는 소작농민이나 머슴, 노비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고액의 소작료를 지불하느라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었거나 주인의 학대와 노역에 시달렸거나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고생하던 농민들이었다. 이 농민들 중 일부가 자신들의 괴롭혔던 양반 지주나 주인을 끌어내어 벌주고 재산을 빼앗는 등의 보복을 가하자 양반들은 위기감과 반감을 갖게 되었다. 이에 이름 있는 전통 양반들이 많이 모여 살던 예산 대흥에서는 군수 이창세를 중심으로 1894년 8월 7일 내포 지역 최초의 유회소(儒會所)가 만들어졌다. 유회소는 유회군, 민보군 등을 조직하여 농민군을 진압하였다.

[경과]

이창세는 대흥 관아에 들어와 행패부린 농민의 상투를 잘라서 내쫓았으며, 1894년에 홍주 목사로 부임한 이승우는 동학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홍주성을 수리하고 무기를 확보하였으며, 군사훈령을 실시하는 한편 조정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였다. 또한, 동학군의 기세를 꺾기 위해 동학 지도자 두 명을 처형하였다.

동학군은 일본군과 직접 싸우기보다는 꽹과리를 치며 큰 소리를 내고 주문을 외우는 등 일본군과 민보군이 겁을 먹고 도망가도록 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반면 관군과 일본군, 양반들이 조직한 민보군[유회군]은 농민군을 보이는 대로 처단하였다.

1894년 10월 7일 경 농민군 지도자 박희인이 예산과 홍주의 동학군을 모아 대흥관아를 기습 공격하여 점령하자 안희중은 대흥 유회군을 소집하여 이창세와 함께 동학군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이라 느끼고, 홍주성으로 가서 이승우의 관군과 협력할 계획을 세우는 등 농민군 진압을 위해 노력하였다.

[결과]

1894년 10월 13일 합덕전투에서 패배한 동학 농민군이 태안쪽으로 후퇴하자 관군과 유회군은 예산 지역의 농민 지도자 유치교 등을 잡아서 처형하고, 동학교도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서 죽였다. 이처럼 상황이 바뀌자 동학에 가담하였던 일부 백성들 중에 민보군에 가담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이후 10월 27일 중군 김병돈이 이끄는 홍주와 예산 관군·유회군 수천 명이 이른 새벽에 신례원에 도착하여 농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농민군은 처음에는 열세였으나 곧 수적 우세와 사기를 바탕으로 관군과 유회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에도 농민군들은 여러 차례 유회군을 무찔렀으나 결국 유회군은 일본군·관군과 연합군을 구성하여 이들을 진압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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