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378
한자 大韓光復會忠淸道支部
영어공식명칭 Chungcheong-do Branch of Dahankwangbokha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이성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16년연표보기 -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18년연표보기 -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 해체
성격 독립운동 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예산 출신 인물들이 활동한 대한광복회 소속 지부.

[개설]

대한광복회는 1915년 7월 15일[음력] 대구 달성공원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이다. 광복회는 만주에 사관학교를 설치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조직되었다. 대한광복회의 투쟁 강령은 ‘무력 준비(武力準備)·무관 양성(武官養成)·군인 양성(軍人養成)·무기 구입(武器購入)·기관 설치(機關設置)·무력전(武力戰)’이었다. 투쟁 강령 대부분이 무력 준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방략이었다. 대한광복회는 결성 직후 전국에 지부를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설립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회원의 확보와 거점의 설치가 가장 시급한 문제였고, 대구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조직된 한계를 극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한광복회는 해당 지역의 유력한 인물을 지부장으로 임명하고 지부 조직과 활동의 책임을 맡겼다.

[설립 목적]

대한광복회는 울산 출신인 박상진(朴尙鎭)이 중심이 되어 한말 의병전쟁 계열과 민족계몽운동 계열이 연합하여 만주에 사관학교를 설치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조직되었다. 이러한 설립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전국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변천]

충청도지부는 홍성·예산·아산·청양·천안을 중심으로 설치되었으며, 지부장은 예산 출신의 김한종(金漢鍾) 이었다. 김한종은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후 충청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동지들을 규합하던 중 1916년 김경태(金敬泰)·김재창(金在昶)과 함께 조선총독 및 일제 고관들을 처단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발각되면서 피신하게 되었고, 채기중(蔡基中)의 소개로 경주로 박상진을 찾아가 대한광복회에 가입한 후 충청도지부 조직에 착수하였다.

가장 먼저 친분이 있던 장두환을 가입시켰다. 장두환 영입 후 충청도 지부원 모집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강석주(姜奭周)·권상석(權相錫)·김경태·김재창·김재풍(金在豊)·성달영(成達永)·엄정섭(嚴正燮)·유중협(柳重協)·유창순(庾昌淳)·이재덕(李在德)·정우풍(鄭雨豊)·정태복(鄭泰福) 등 50여 명의 회원을 모집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충청도지부는 대한광복회의 대표적인 지부였다. 대한광복회 지부 중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하였고,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충청도지부는 예산·연기·인천에 미곡상으로 위장한 연락 거점을 설치하였다. 상호는 알려지지 않지만 예산은 김재창, 연기는 박장희가 담당하였다. 인천에 설치한 미곡상은 강석주·이재덕·황학성 등 충청도지부원들이 책임을 맡고 있었다. 이 밖에 지부원들의 거처가 충청도지부의 거점으로도 활용되었다. 천안의 성달영가(成達永家)와 아산의 강석주가(姜奭周家)·성문영가(成文永家) 등이 활동 거점으로 활용되었으며, 지부장 김한종광시면 신흥리 집은 충청도지부원들이 자주 회합을 갖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충청도지부가 연락 거점으로 미곡상을 이용한 것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함이었고, 비밀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충청도지부원들은 자금 모집에도 주력하였다. 대한광복회 설립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한광복회의 군자금 모집은 다양한 방법으로 추진되었다. 대한광복회원 자신들의 재산을 헌납하기도 했으며, 일제의 현금수송 마차를 공격해 자금을 탈취하기도 하였다. 일본인 소유의 광산을 공격하거나 중국 지폐를 위조해 정화(正貨)로 바꾸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더욱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였고, 대한광복회는 전국의 자산가들로부터 의연금을 모집하는 방법도 추진하였다.

충청도지부의 자금 모집은 지부장 김한종의 책임하에 전개되었다. 김한종은 1917년 11월[음] 장두환·정태복·엄정섭에게 충청도 일대의 자산가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김한종은 조사된 자산가들에게 보낼 고시문을 작성하고, 이재덕과 당시 장곡면장이었던 정태복에게 면사무소 등사기를 이용해 200여 장을 인쇄하도록 하였다. 김한종은 인쇄된 고시문에 김재풍이 제작한 ‘광복회지령회원감독장(光復會指令會員監督章)·제의안인(濟義安印)·변창희(卞昌曦)’ 명의의 인장을 날인해 장두환에게 발송을 지시하였다. 장두환은 인천의 연락 거점에서 김재창·황학성과 함께 고시문에 ‘주의사항’을 첨부하여 충청도 일대에 발송하였다. 당시 발송된 고시문은 160여 통에 이르며 모금액도 170여만 원에 이를 정도로 치밀하게 추진되었다. 김한종은 통고문의 효력을 높이기 위해 “앞서 발송한 포고문을 받았을 것이다. 비밀을 엄수하고 배당금을 준비하여 본회원의 요구를 기다려 교부해야 한다.”라는 지령장을 발송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통고문을 수령한 이들이 일제 경찰에 신고함으로서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예방하고 자금 모집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충청도지부뿐만 아니라 대한광복회 의연금 모집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통고문을 수령한 이들이 일제에 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복회는 민족적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친일파를 처단하는 의협 투쟁(義俠鬪爭)을 벌였다. 충청도지부에서는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였다. 박용하 처단은 김한종 주도하에 충청도 지부에서 거행하였다. 박용하는 대한광복회 통고문을 일제 헌병에게 신고했을 뿐만 아니라 도고 지역에서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김한종대한광복회의 군자금 모집과는 별도로 지역 주민을 괴롭히는 친일 면장을 처단해 친일 세력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야 한다고 여겼다. 김한종은 천안의 성달영 집에서 모임을 갖고 장두환에게 박용하 처단을 지시했으며, 장두환은 김경태·임세규에게 실행을 지시하였다. 김경태와 임세규는 성달영 집에서‘사형선고문’에 박용하의 이름을 기입한 후 1918년 1월, 박용하의 집을 찾아가 처단하였다. 그러나 대한광복회는 1918년 일제에 발각되어 지부장 김한종을 비롯해 장두환, 김경태 등 충청도 지부원들이 체포되었으며, 박상진·채기중·임세규·이관구 등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면서 와해되었다.

[의의와 평가]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시기 민족운동 세력을 규합해 독립을 목적으로 무장투쟁을 준비했던 대표적인 비밀결사였다.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 단체로는 유일하게 전국적 조직을 갖추고 의협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의열 투쟁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공백을 메우고 민족 역량이 3.1운동으로 계승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대한광복회 지부 중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했으며, 군자금 모집과 의협 투쟁에서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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