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390
한자 靑年運動
영어공식명칭 Youth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이성우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예산 지역에서 전개된 청년 단체들의 사회개혁운동.

[개설]

청년운동은 1919년 3.1운동 후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3.1운동 과정에서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이념 체계를 갖춘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 아래 1920년대 초부터 청년 단체들이 조직되기 시작하였으며, 1922년에 전국적으로 500여 개의 단체가 조직되었다.

예산 지역에는 지역별 청년회가 조직되어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에도 참여하였고, 특히 문화 계몽 운동과 문맹퇴치운동에 앞장섰다. 1920년대에는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운동에 주력하였고, 1930년대에는 학생 운동 및 사회주의사상과 연관된 항일운동으로 성격이 변모하였다.

기독교에서도 청년회를 조직하여 포교와 연관하여 실력양성운동에 참여하였다.

[예산의 청년 운동]

예산에서 가장 먼저 조직된 청년 단체는 예산청년회이다. 예산청년회는 1920년 조직되었으나 유명무실하였다. 1921년 10월 예산교회 목사인 한태유(韓泰裕)가 중심이 되어 다시 조직되었다.

예산청년회는 회원이 200여 명에 달했으며 지식 계발, 우의 돈독, 지방 발전 등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조선청년연합회 순회강연회를 개최하였고, 1923년에는 금주단연운동, 조선산 의복 착용, 소비조합 설립, 소인극 개최 등의 사업을 벌였다. 예산청년회는 1927년 11월 회장에 안석원(安鉐遠), 부회장에 이종대(李鍾大) 등을 추대하고 혁신운동을 전개했으며, 1931년 6월 회장에 성낙훈(成樂薰), 부회장에 안석원 등을 간부로 선출해 조직을 개편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임시대회를 열어 회장제를 집행위원장제로 개편하고 집행위원장 이만섭(李萬燮)과 서무부, 문화부, 체육부, 농민부, 노동부, 조사부의 임원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1931년 8월 29일 예산의 가설극장에서 대동가극단 순회공연 중 연기자들이 일본 말을 사용한 것을 보고 청년회원들이 야유를 보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청년회원들을 구속하고 예산청년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 밖에도 예산면에서는 1928년 금오청년회(金烏靑年會)가 조직되어 회장에 김석배(金石培)를 선출하고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청년운동은 예산면에서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1927년 11월에는 오가면에서 자구청년회(自救靑年會)가 창립되었으며, 1928년 12월에는 고덕면에서 대천수양청년회(大川修養靑年會)가 창립되어 활동을 벌였다. 고덕면·봉산면·덕산면의 청년들은 1928년 9월 봉산면 공회당에서 덕봉청년회(德鳳靑年會) 창립총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는 창립총회부터 해산명령을 내려 총회를 개최하지 못하였다. 조직 시기는 명확치 않으나 삽교청년회도 창립되어 활동하였다. 삽교청년회는 1930년 8월 이후 다시 활동을 시작해 9월 25일 임시대회를 열고 예산청년동맹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삽교청년회는 예산청년동맹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예산 지역의 청년운동을 주도하고자 했으나 1934년 일제에 의해 해체되었다.

일제는 이러한 청년운동을 탄압하고 ‘역행청년회’ 같은 어용 청년회 등을 만들어 친일파 양성 및 황국신민화 정책에 동원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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