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393
한자 現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문경호

[정의]

1945년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 충청남도 예산 지역의 역사.

[개설]

[1945년~6.25전쟁 시기의 예산]

광복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각지에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 시기 예산 지역에서는 최길용을 중심으로 하는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어 군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광복과 함께 친일 인사에서 우익 인사로 변모한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예산지부 위원장을 맡은 성원경과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성원경은 일제강점기 도의원과 중추원참의를 역임한 친일 인사였다. 이러한 상황은 좌우합작이라기보다 우익이 강세를 보인 예산 지역의 힘 관계의 결과로 이해된다.

1945년 9월 8일 국내에 진입한 미군이 군정을 시작하면서 예산 지역에도 미군 제24군단 제6사단 제41군정 중대가 1945년 11월 17일 경에 도착하였다. 미군은 1947년 5월 31일까지 예산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했다. 군정 당시 예산, 서산, 홍성 일대에는 사회주의 세력이 중심이 된 인민위원회와 경찰, 우익 인사들과의 대립으로 혼란이 거듭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 사항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찬탁과 반탁을 둘러싼 좌우 정치세력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그러나 이와 관계없이 미국과 소련은 1946년과 1947년에 신탁통치를 위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두 차례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였으나 두 나라의 의견 차이로 인해 성공하지 못하였다. 결국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반도 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갔고, 유엔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남한 단독선거를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가 시행되었으며, 이에 따라 예산에서는 무소속의 윤병구가 제헌국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5.10총선거에 따라 조직된 제헌국회에서는 헌법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6.25전쟁 시기 예산에서는 북한군을 등에 업은 좌익과 우익 간의 대립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북한군이 예산을 장악하자 지방 좌익들은 경찰이나 관료, 우익청년단 간부들을 색출하여 감옥에 가두고 인민재판을 실시하여 처형하였으며, 우익 세력은 보도연맹원 처형, 부역행위자 색출 및 처벌 등을 구실로 많은 좌익 인사들을 처형하였다. 또한, 우익 청년들은 태극단, 의열단, DK단 등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 예산 지역 조사팀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피해 실태를 조사하여 보도연맹사건 관련 피해자 18명, 부역혐의 관련 피해자 534명, 형무소 7명, 미군사건 5명, 북한군과 지방좌익 및 빨치산에 의한 학살 피해자 134명 등 모두 712명의 피해자를 확인하였다.

[4.19혁명~제3공화국 시기의 예산]

6.25전쟁 직후 이승만은 자신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 등 무리한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을 시도하다가 4.19 혁명으로 무너졌다. 예산 지역에서는 4.19혁명 시기에 직접적인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4.19혁명 직후인 5월 초에 예산읍의 공관에서 예산군향토건설동지회 주최로 ‘4월혁명순국위령제’가 열리는 등 추모행사를 하였다.

4.19혁명 직후에는 장면 정권이 수립되어 경제개발계획 등을 수립하고, 농어촌의 부흥, 금융의 대중화, 부정 축재자 재산 회수 등을 시도하였으나 5.16군사정변으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5.16군사정변 이후 수립된 박정희 정부는 ‘조국근대화’를 외치며 획일적인 경제 정책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예산에서는 예산농업고등학교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재건위원회, 재건청년회, 재건부인회’ 등이 조직되어 농지개량과 식량 증산 활동을 벌였다. 한편, 1965년에는 굴욕적인 한일협정의 졸속 체결을 비판하는 시위가 열렸으며, 1969년에는 예산의 많은 군민들이 박정희의 3선개헌에 반대하는 대열에 참여하였다.

유신헌법이 제정된 이후에는 예산 지역에서도 관제 조직을 중심으로 각종 행사가 시행되었다. 심지어서는 학교에서도 유신헌법이 ‘대한민국의 발전과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훌륭한 헌법’이라고 선전되었다. 또한 박정희 정부는 1970년대에 대대적으로 강과 하천을 정비하고 저수지와 콘크리트 보(洑)·수로를 새로 축조하거나 정비하였는데, 이러한 사업은 홍수와 가뭄의 피해를 줄이고 농사를 짓는 데 많은 편리함을 주었으므로 무한천·삽교천 정비와 예당저수지 완공 등으로 인한 수리(水利)의 혜택을 직접적으로 보게 된 예산 지역 농민들의 많은 수가 박정희를 지지하게 되었다.

1970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외모를 크게 변화시켰고 농가의 소득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대대적인 농촌 가꾸기 사업비 지원 등으로 상당히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근대화를 외치며 전통 민속 문화를 마구 파괴하는 경우도 많았다. 마을별로 내려오던 성황제나 산신제 등이 대부분 없어진 것도 이 시기였다.

[제5공화국~6월민주항쟁 시기의 예산]

1980년대 충남은 본격적인 상농업화 시대를 맞아 지역별로 비교우위가 있는 작목을 생산하는 특화 작목 지역을 지정하였는데, 예산은 핵심 작목으로 사과와 한우가 지정되었다. 이 시기까지도 예산의 주요 산업이 농업이었으므로 타 지역에 비해 도로 건설이나 도시 발전 등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예산리 일대가 88서울올림픽 성화 봉송로 구간에 포함되면서 예산리 일대의 도로가 확장·정비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도로 정비 사업과 발전 계획 등이 수립되었으나 제대로 추진되지는 못하였다.

1987년 6월민주항쟁 시기에는 전국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예산 인근의 천안, 공주, 온양, 홍성 등에서도 시위가 거의 매일 열렸다. 이 시기 예산 주민들은 천안역광장과 천안 오룡동성당에서 열리는 집회에 주로 참가하였다. 예산농업전문대학 운동장에서 예산농의회가 주도하는 집회가 열리기도 하였으며, 6.29선언이 발표된 후인 9월 15일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예산지부’가 예산천주교회에서 결성식을 갖고 평화행진을 벌이려 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기도 하였다.

[1990년~현재까지의 예산]

1990년대에 들어 일제강점기에 중심지 역할을 했던 구도심과 예산시장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공동화 현상이 심각해졌다. 또한, 주변 도시 지역으로 인구가 분산되면서 인구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에 예산군에서는 도심의 분수 광장을 정비하고, 추사의 거리를 조성하는 등 도심 정비 사업을 추진하여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편, 도로 교통이 발달하면서 비둘기호가 없어지고, 장항선에서 새마을호가 기존 왕복 6차례 운행되던 것이 왕복 10차례로 늘었으며, 무궁화는 왕복 24회에 운행되던 것에서 22회로 줄어들었다. 왕복 6회 운행되던 통일호는 아예 없어졌다. 2007년에는 장항선 철도 직선화 공사가 진행되면서 예산역신례원역이 새로 준공되었다. 예산우체국 앞 분수대와 하나은행 예산지점 자리에 있었던 예산버스정류장은 1992년 3월 31일 예산군 예산읍 산성리예산종합터미널로 이전하였다.

1990년대 이후 예산군은 농업의 활성화와 산업 인구 유치를 위해 1990년에 예산읍 주교리오가면 원평리 일대 무한천변에 예산농공단지를 설립하였으며, 2005년에는 예산읍 관작리 일대에 관작전문농공단지를 조성하였다. 예산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농산물은 예산 사과와 쪽파이다.

2015년 10월 예산군은 옛 공주대학교 산업과학대학 부지로 청사 이전 계획을 수립하고 2018년 4월 신청사를 완공하여 이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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