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461
한자 禮山伽倻寺址
영어공식명칭 Gayasaji
분야 종교/불교
유형 유적/터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5-28
시대 고려/고려 초기
집필자 성부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98년 12월 24일연표보기 - 예산가야사지 충청남도 기념물 제150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예산가야사지 충청남도 기념물 재지정
소재지 예산가야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5-28 지도보기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기념물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에 있는 절터

[개설]

가야사가야산(伽倻山)[677.6m]에 있던 절이며, 가야산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운산면, 해미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주봉인 가야봉을 중심으로 원효봉(元曉峰), 석문봉(石門峰), 옥양봉(玉洋峰) 등의 봉우리가 있다. 백제 때 상왕산(象王山)이라 불렀는데, 신라 통일 후 상왕산 밑에 가야사를 세운 뒤 가야산이라 하였다. ‘가야’라는 산 이름은 불교에서 신성시되는 코끼리인 상왕의 범어 카야(Kaya)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신라 때는 가야산사를 짓고 중사(中祀)로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시대까지도 덕산현감이 봄·가을로 고을 관원을 시켜 제를 올렸다. 가야사가 있던 곳은 가야동이라고 불리는데 사역(寺域)은 넓은 골짜기를 모두 포함하고 있어 가람의 규모가 엄청나게 웅장하였음을 추측하게 한다. 9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며, 절터의 중심지라고 전하는 곳에는 조선 말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가 있다. 예산가야사지는 1998년 12월 24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변천]

예산가야사지와 관련된 문헌을 살펴보면 1177년[명종 7] 망이, 망소이가 가야사를 공략한 기록이 있는데 산명(山名)과 사명(寺名)이 ‘倻’와 ‘耶’로 서로 다르게 나타나 있다. 보덕사에 소장 중인 목판에 ‘耶’로 되어 있으므로 본래는 ‘亻’ 변이 없는 가야사(伽耶寺)가 후에 가야사(伽倻寺)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가야사의 사력(寺歷)이 고려 중기 이전까지 소급된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각각 ‘가야사재가야산(伽倻寺在伽倻山)’, ‘가야사재현서십리가야산하(伽倻寺在縣西十里伽倻山下)’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기와편이 주변에 여기저기서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계속해서 법등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요섭의 「조선의 공여적제탑」에 “범우교에는 덕산에 가야사가 있어 철첨의 석탑이 있고 그 4면에 석감이 있어 각 석제불을 안치하였다. 제심이 기교하여 속칭 금탑이라 하였다.”라는 것으로 볼 때 탑을 비롯해서 거대한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산가야사지에서 회청색 경질과 적색 기와가 수습되고 있는데, 적색기와는 굵은 선문이 시문되어 있으며 나머지 회청색 경질 기와는 조합문(組合紋), 선문(線紋) 등이 시문되어 있다.

[위치]

덕산면 소재지에서 옥계저수지 쪽으로 난 서북쪽 도로를 따라 약 4.2㎞ 가면 상가리 남천마을이 나온다. 남천마을에서 서북쪽 계곡을 따라 가면 가야산 석문봉의 바로 동쪽 밑에 넓게 형성된 골짜기가 있다. 골짜기 가운데 조그만 구릉이 내려오다가 남연군의 묘가 있는 곳이 예산가야사지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63년 교수 이은창의 현지 조사 때 “석축대와 초석 등의 건물지 일부가 확인되고 있다.”라고 하였으나 현재는 개간으로 인하여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상태로는 절터의 가람을 전혀 확인할 수 없으나 사찰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남연군의 묘 부근은 조선시대 기와편, 초석(礎石)으로 보이는 대형 석재들이 산재되어 있다. 예산가야사지에서 수습되는 유물은 다수의 기와편과 자기편들인데 다수의 석물이 보덕사로 옮겨졌다고 하며 북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미륵불 입상이 있는데 미륵불 입상도 가야사지와 관련된 유물로 추정된다.

[현황]

가야사는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조성하면서 폐사되어 현재 남아 있는 상태로는 절터의 가람을 확인할 수 없다. 넓은 골짜기에 걸쳐 대사찰이 조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예산 가야사지는 현재 대부분이 개간되어 밭과 논으로 경작되고 있어 절터의 가람을 추정할 만한 유구는 이미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야동 계곡의 적지 않은 논과 밭에 산견되고 있는 기와편과 석재, 자기편들로 보아 광범위한 규모로 사찰이 조영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가야산은 서산시, 예산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서해안과 가까워 예로부터 중국과의 문화 교류가 가야산을 거쳐 왔다. 자연히 가야산 북쪽 계곡에 개심사, 문수사, 보원사가 창건되고 남쪽 가까운 덕숭산수덕사가 창건되었다. 통일신라 때에는 서산 관내에 있는 개심사, 문수사 특히 보원사가 융성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 시기 왜구가 침략하면서 안전지대인 덕산에 있는 가야사지가 더 융성하였을 것이다. 망이·망소이 난 때 “가야사에 보물이 많았다.”라고 한 것은 부근 사찰 중심축이 예산가야사지로 옮겨 왔다는 역사적 근거로 보인다. 조선 말 풍수자리에 현혹된 흥선대원군의 가야사 훼손 사건은 시대적 암영을 후세인에게 남겨 준 사건이다. 예산가야사지는 천년 고찰이 왕권의 영달로 사라진 것을 일깨워 주는 역사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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