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566
한자 金絿神道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40년연표보기 - 김구 신도비 건립
보수|복원 시기/일시 1984년 - 김구 신도비 추가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488년 - 김구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534년 - 김구 사망
현 소재지 김구 신도비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 지도보기
성격 비석
양식 옥개형
관련 인물 김구
재질
크기(높이, 너비, 두께) 158.5㎝[비신 높이]|62㎝[비신 폭]|16.7㎝[비신 두께]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김구의 신도비.

[개설]

김구 신도비는 1640년(인조 18) 세워진 비석과 1984년 다시 세워진 비석 총 2기가 있다.

김구(金絿)[1488~1534]는 자가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 본관은 광산으로 서울 연희방에서 태어났다. 김구의 아버지 김계문은 대흥현감을 역임하던 중 부인 전의이씨의 문중이 세거하고 있던 예산현 입암면(立岩面)[현 신암면]에 입향하였다. 이후 김구의 거주지는 서울 인수방(仁壽坊)이었지만 예산군 신암면과도 깊은 인연을 맺는다. 16세와 20세에 두 번의 장원 후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홍문관 부제학까지 올랐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당하였다. 유배 중에 부모의 부음을 듣고 시묘를 살다가 결국 1534년(중종 29) 11월 47세에 사망하여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에 묻혔다.

[건립 경위]

김구 신도비김구가 사망하고 100여 년이 지난 후 건립되었다. 김구에 대한 추숭 활동의 일환으로 신도비 건립과 증직, 묘비 건립, 덕잠서원 건립 등이 함께 추진되었다. 1591년(선조 24) 김구는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1636년(인조 14) 김구의 문집 『자암집(自菴集)』이 초간되었으며, 4년 뒤인 1640년(인조 18) 묘비가 건립되었다.

[위치]

김구 신도비예산군 신암면 종경리에 있는 김구의 묘소 바로 앞에 1기가 있고, 묘소에서 아래로 20m 떨어진 곳에 1기가 더 있다.

[형태]

묘소 앞에 있는 신도비는 1640년 건립된 것으로, 옥계형 이수(螭首)[비석의 몸돌 위에 얹은 덮개돌]가 있는 화강암 묘비이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158.5㎝, 폭 62㎝, 두께 16.7㎝이다.

[금석문]

김구의 묘비명은 성균관 대사성 김세렴이 찬하고 글씨는 외현손 안응감이 썼다. 비신 앞면에는 ‘통정대부 홍문관지제교 겸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겸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자암김선생휘구지묘, 증정부인 김해김씨부좌(通政大夫弘文館知製敎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 自庵金先生諱絿之墓, 贈貞夫人金海金氏祔左)’라고 새겨져 있으며 『자암집』 부록에 비문 전체가 실려 있다. 묘소에서 아래로 20m 떨어진 곳에 정찬모가 서(書)하고 전(篆)하였으며, 김용준이 지(識)하여 1984년 다시 세운 신도비가 있다. 장방형의 대좌 위에 오석의 비신을 세우고 옥계형 이수를 올렸다.

[의의와 평가]

김구 신도비는 사후 100년 후에 건립되었다. 신도비와 1705년 건립된 덕잠서원과의 연관성 등을 통해 당시 예산 지역에서 광산김씨의 영향력과 김구를 중심으로 한 사림들의 활동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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