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574
한자 李晩神道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평촌리 까치골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752년연표보기 - 이만 신도비 건립
현 소재지 이만 신도비 -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평촌리 까치골 지도보기
성격 비석
양식 옥개형
관련 인물 조한|이용하|허목
크기(높이,길이,둘레) 275㎝[전체 높이]|193㎝[비신 높이]|78㎝[비신 폭]|23.5㎝[비신 두께]|57㎝[대좌 높이]|140㎝[대좌 가로]|83㎝[대좌 세로]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평촌리 까치골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이만의 신도비.

[개설]

이만(李曼)[1605~1664]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지만(志曼)이다. 이만은 1627년(인조 5) 박사로 뽑히고 1628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형조낭청 겸 기사관을 거쳐 예조좌랑, 정언을 지냈다. 1636년 부수찬을 거쳐 수찬으로 있을 때 적극적인 척화를 주장하다가 병자호란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후 어머니 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났다가 1639년 복직하여 여러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이후 아버지 상을 당하여 다시 은거하였다. 1644년 교리가 되고 정랑, 승지에 이어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고, 1645년 완원군에 봉해졌다. 이후에도 여러 요직에 있었다. 이만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 표류해 온 중국 배가 있어 조정에서 중국 배를 청나라로 압송하였다. 이때 왜정가려(倭情可慮)[왜의 뜻을 생각해 볼만 함]를 이유로 남방의 수성연졸(修城鍊卒)[성을 수리하고 병졸을 훈련시킴]을 주장하였다. 그러자 청나라는 병자호란의 강화조약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사신을 보내어 추궁하였고, 이만은 영변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1년 뒤 풀려났지만 이후에도 복직과 파직을 반복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이만은 1663년(현종 4) 벼슬을 그만두고 아산의 시골에서 지내다가 1664년 사망하였다.

[건립 경위]

이만의 신도비가 건립된 예산군 응봉면 평촌리 일대는 이만의 사전[사패지]로 알려져 있다. 이만이 말년에 서울 상도동에 있던 아버지의 묘소를 이장한 후 평촌리에 내려와 살았다고 한다. 미수 허목이 쓴 ‘대사헌완원군이공묘지명(大司憲完原君李公墓誌銘)’에 따르면 “이만은 파직되어 시골로 내려 온 후 60세에 생을 마치니 그해 9월 대흥현 북작동 남향 언덕에 안장하였으며, 8년 뒤 부인인 문화류씨가 세상을 떠나자 합장하여 옛 장지에서 서쪽 사향 언덕에 안장하였다.”라고 한다. 허목의 기록에서 보이는 ‘대흥현 북작동’은 현 응봉면 평촌리 일대를 가리킨다.

[위치]

이만 신도비이희손 신도비와 함께 예산군 응봉면 평촌리 까치골 과수원이 있는 야산 구릉 위쪽에 있다.

[형태]

이만 신도비는 옥개형의 이수를 올린 형태로 전체 높이는 275㎝이다. 세부적인 비신의 크기는 높이 193㎝, 폭 78㎝, 두께 23.5㎝이고, 대좌의 높이는 57㎝, 가로는 140㎝, 세로 83㎝이다. 신도비는 이만이 세상을 떠난 지 90여 년이 지난 1752년(영조 28) 세워졌다. 조한(趙漢)이 찬(撰)하고 이용하(李龍河)가 글씨를 썼으며, 허목(許穆)이 전액(篆額)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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