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591
한자 禮山李山海-墓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상항방산로 319-50[방산리 산7-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609년연표보기 - 예산 이산해의 묘 조성
이전 시기/일시 1609년 - 예산 이산해의 묘에 부인 양주조씨 묘 합장
개축|증축 시기/일시 1856년 - 예산 이산해의 묘 묘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2010년 12월 30일연표보기 - 예산 이산해의 묘 충청남도 기념물 제184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예산 이산해의 묘 충청남도 기념물 재지정
현 소재지 예산 이산해의 묘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상항방산로 319-50[방산리 산7-1]지도보기
성격 능묘
양식 봉토분
관련 인물 이산해|이덕형|광해군
크기(높이,길이,둘레) 5,490㎡[면적]|11m[봉분 둘레]|1.8m[봉분 높이]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기념물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문신 이산해의 묘.

[개설]

예산 이산해의 묘는 조선 선조 때 재상이자 문인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와 부인 양주조씨의 합장묘이다. 이산해가 말년에 거주하였던 예산에 묘를 조성하였고, 풍수지리상의 이유로 연못을 함께 조성하였다. 예산 이산해의 묘는 2010년 12월 30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이산해의 본관은 한산,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 종남수옹(終南睡翁)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현령을 지낸 이장윤(李長潤)이며, 할아버지는 판관 이치(李穉)이고,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이지번(李之蕃)이다. 작은아버지가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쓴 이지함(李之菡)이다. 이산해는 이지함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561년(명종 l6) 문과에 급제하여 주요 관직을 거치고 1600년(선조 33) 영의정을 지냈다. 북인의 영수였으며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책록되었다. 서화(書畵)에 능하여 문장팔가(文章八家)라 일컬었다. 이산해가 쓴 책으로 『아계유고(鵝溪遺稿)』가 있다.

[건립 경위]

이산해는 선조 때 두 번이나 영의정을 역임한 정치가이자 당대 손꼽히는 문필가였다. 말년에 예산에서 생활하였는데 1609년 8월 이산해가 한양에서 사망하자 광해군이 직접 현역 대신의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보령에 있던 부인 양주조씨의 묘를 이전해 함께 합장하였다.

예산 이산해의 묘는 풍수 명당 일화와 묘역 조성 일화도 유명하다. 이산해의 사위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은 장지가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옥녀탄금혈(玉女彈琴穴)인데 바라보이는 곳에 물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혈맥의 하단인 현재의 연당자리에서 흙을 파서 묘소로 운반하여 봉분과 제전을 조성하여 음택의 혈을 보완하고 아래에 자연스럽게 기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연당을 조성하였다. 당시는 초겨울이라 담당할 인력이 부족하였는데, 마침 현등산[현 천방산] 천방사 승려의 도움을 받았다고 전한다. 이산해는 생전에 연꽃을 좋아하여 연꽃이 만개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천리 길도 마다 않고 말을 타고 가 구경하였다고 한다. 아들 석루(石樓) 이경전(李慶全)[1567~1644]과 한음 이덕형은 조성된 연못에 연을 심었고, 연당 내에는 이산해가 생전에 산수 사이를 왕래하며 시를 읊고 신선처럼 살기를 갈망하며 선계를 동경하던 것을 기리어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각각 나무를 심어 영혼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고자 하였다고 전한다. 연당의 연꽃과 삼신도에 정성껏 심은 나무는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연당을 수호하고 있다.

[위치]

예산군 대술면 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3㎞ 이동하여 방산저수지 가는 길을 따라 3.5㎞ 가면 음지말에 이른다. 예산 이산해의 묘는 음지말 이산해 사당 뒷산에 있다.

[형태]

예산 이산해의 묘는 조성 당시 함께 만든 연못이 있고,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상석과 문인석, 석주가 묘 앞에 늘어서 있으며, 1856년(철종 7) 묘비를 새로 만들었다. 면적은 5,490㎡이고 봉분 둘레 11m, 높이는 1.8m이다.

[의의와 평가]

왕과 재상이 직접 예산 이산해의 묘 조성에 관여한 것으로서 아계 이산해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예산 이산해의 묘는 묘에 연못을 함께 만든 특수한 사례로 연구 가치가 있다. 이산해의 묘가 조성되면서 사당과 신도비 등 이산해를 기리는 유적 대다수가 예산에 세워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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