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593
한자 旌閭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제연

[정의]

충청남도 예산 지역에 있는 조선시대의 충신·효자·열녀의 행적과 의미를 기리기 위하여 나라의 명을 받아 세운 정려.

[개설]

정려는 조선시대에 삼강의 덕목을 잘 지킨 효자, 충신, 열녀를 나라에서 포상한 것으로 대문에 명정의 기록을 현판으로 만들어 정문이라 하거나 마을 입구에 정려 정각, 또는 비를 세워 포장(褒奬)하였다. 넓은 의미로는 충효열(忠孝㤠)을 기리는 정각(旌閣), 정문(旌門), 정려(旌閭), 비(碑) 등이 포함된다.

[정려 포장의 절차]

조선시대에는 삼강의 덕목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삼강의 덕목을 잘 지켜 모범이 될 만한 사람들 충신·효자·열녀로 선정하고 포장하였다. 충효열을 기리기 위한 국가 차원의 표창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물질적인 포상인 상물(賞物), 관직을 내리는 상직(賞職), 세금을 면하는 복호(復戶) 등이다. 하지만 가장 높은 포상인 명정(銘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명정 현판을 대문 앞에 걸거나 마을 입구에 정려각을 만들어 보관하는 등 가문에서 중요하게 여겼다. 명정 현판을 보관하기 위해 세운 정려는 마을 입구에 있는 사례가 많다. 그만큼 조선시대에 충효열을 상징하는 정려는 사회적 의미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려 포장 절차는 대체적으로 고을의 유림들이 연명으로 충효열의 사연을 적어 수령에게 천장으로 보고하면, 수령이 감영에 다시 보고하는 과정을 거쳤다. 감영에 보고된 인물들은 관찰사가 예조에 올리는 과정을 거쳐 의정부의 심사를 받았다. 의정부의 심사를 받은 충효열도 왕의 재가가 있어야 비로소 선정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려의 수여 과정은 대개 수년에 걸쳐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며 급작스럽게 추진되기도 하였다. 정려 수여는 개인의 명예인 동시에 가문의 영광이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정려 수여 과정을 통해 지역에서 유력한 가문을 유추할 수도 있다.

[정려의 구조]

정려는 대부분 정면 1칸, 측면 1칸 혹은 2칸의 건물로 맞배지붕 형태가 많다. 정려를 둘러싸는 4면에 홍살을 세우고 정려 처마의 양옆에 방풍판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정려의 내부에는 명정 현판·정려의 개보수를 기록한 중수기, 비각을 함께 세우는 경우 비각기, 비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산의 정려]

예산군에도 충효열을 기리기 위해 내린 정려가 많이 있다. 관련 기록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 나온다. 조선 후기 읍지인 『여지도서』의 정려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예산현에 10건, 덕산현에 17건, 대흥군에 12건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예산군의 정려는 36건으로 충신 2건, 열녀 8건을 제외하고 대부분 효자 정려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구분하여 보면 예산이 7건, 덕산이 15건, 대흥이 13건이다.

예산은 대부분 효자, 열녀의 정려이다. 예산의 정려에서 주목되는 것은 박신흥(朴信興) 정려이다. 박신흥은 조선 후기 인물로 효자임을 인정받아 정려가 세워졌다. 박신흥 정려는 정려 건립과 관련된 상물 포상, 명정, 증직 등에 대한 문서가 다수 남아 있어 조선시대 정려 과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덕산에는 충효열의 정려가 모두 있다. 충신 정려로 남평현감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송현에서 적과 맞서다 순국한 한순(韓楯) 정려와 병자호란 때 광주 쌍령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한 이억(李檍) 장군 정려가 있다. 열녀 정려에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무신으로 신립의 천거를 받기도 한 정현룡(鄭見龍) 처(妻) 우봉이씨(牛峰李氏)의 정려가 있다. 효자 정려는 조선 후기의 것이 대부분이며 부부가 표창을 함께 받은 김의재·창원황씨 부부 정려, 신효·밀양박씨 부부 정려 등도 있다.

대흥에는 효자, 열녀의 정려가 있다. 이성만(李成萬)·이순(李恂)은 우애 좋은 형제로 부모 봉양과 수묘의 효행 등을 인정받아 정려가 세워졌다. 이성만·이순 형제는 고려시대 인물이지만 명정을 받은 것은 1497년(연산군 3)으로 정려 건립이 후대에 이루어진 경우를 보여 주는 사례이다.

[평가와 의의]

정려는 나라에 헌신한 충신과 삼강의 덕목을 지킨 효자, 열녀를 포상함으로써 널리 모범이 되게 하고자 건립되었다. 하지만 정려는 포상의 의미를 넘어서 조선시대 지방 사족의 활동을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예산군의 충효열 정려는 조선 후기로 가면서 수가 증가하며 현존하는 정려는 충신에 비하여 열녀, 효자의 비율이 높다. 정려 연구는 예산 지역 사회사 연구에 기초 자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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