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605
한자 朴鎭昶旌閭
이칭/별칭 효자 박진창 정려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사리서길 51-11[사리 826-2]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93년연표보기 - 박진창 정려 건립
현 소재지 박진창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사리서길 51-11[사리 826-2]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홑처마 맞배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사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효자 박진창의 정려.

[개설]

박진창 정려는 조선 후기의 효자 박진창(朴鎭昶)[1784~1837]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박진창은 본관이 평산, 자는 행원(行源), 초명은 박사구(朴思九)이다. 명정 현판 위에 걸려 있는 안상열 등의 상서 내용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효행으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부모 생전에 극진히 모시고, 부모가 죽자 묘 옆에서 5~6년 동안 여막을 짓고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효행이 알려져 1893년(고종 30) 명정을 받았다.

[위치]

박진창 정려예산군 고덕면 사리에 있으며, 사리는 박재희(朴再禧)[1702~1763]가 입향한 이래로 평산박씨 집성촌이 되었다.

[변천]

박진창이 죽은 후 13년이 지난 1850년(철종 1) 덕산 유학 안상열 등이 명정을 요청하는 상서를 올렸다. 1870년(고종 7) 4월과 9월 『승정원일기』 기록에서 상서 내용이 확인된다. 4월 고종이 대궐 밖으로 거둥할 때에 해당 내용에 대해 보고하고, 관리를 보내 실적을 자세히 조사한 뒤에 보고하겠다는 내용 중에서 “공충도 유학 윤선재 등이 덕산의 고 학생 박진창의 효행을 상언” 한 사실이 있다. 이어서 9월 이승일 등이 다시 한 번 요청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상언 직후 곧바로 정려가 건립되지 않았으며 정려 건립 시기인 1893년까지는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서 과정을 확인하기 어렵다.

[형태]

박진창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이며 홑처마에 맞배지붕 양식이다. 좌우의 박공 아래는 방풍관이 설치되어 있으며 4면에는 홍살이 둘러져 있다. 정려 내부에는 1893년 내려진 ‘효자학생평산박진창창지려 광서계사 이월 일 립(孝子學生平山朴鎭昌昶之閭 光緒癸巳 二月 日 立)’이라고 쓰인 명정 현판이 걸려 있다. 아래에는 1850년 덕산 유학 안상열 등이 올린 상서가 새겨져 있다.

[의의와 평가]

정려는 왕에게서 받는 최고의 포상 중 하나로 정려를 받으려면 지역 유림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그러한 점에서 박진창 정려는 유림들이 직접 나서서 명정을 요청하는 조선시대 정려 건립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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