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613
한자 李檍將軍旌閭
이칭/별칭 이억 충신 정려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금치리 산110-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02년연표보기 - 이억장군 정려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858년 - 이억장군 정려 중수
문화재 지정 일시 1986년 11월 19일연표보기 - 이억장군 정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82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이억장군 정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현 소재지 이억장군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금치리 산110-6 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초익공|겹처마 맞배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경주이씨종중
관리자 경주이씨종중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금치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충신 이억의 정려.

[개설]

이억장군 정려는 병자호란 때 순절한 충신 이억을 기리는 정려로 1702년(숙종 28) 명정을 받아 세워졌다. 1986년 11월 19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8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이억(李檍)[1615~1636]의 본관은 경주, 자는 여량(汝樑), 아버지는 현감 이석립(碩立)이다.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로 승마와 활쏘기에 능하였고 병법에 밝았다. 22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도병마절도사 이의배 지휘하에 전투에 참여하였고 광주 쌍령에서 적을 만나 싸우다 전사하였다. 1702년 명정을 받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이억에 대한 기록은 『숙종실록』에 자세히 나온다. 1702년[숙종 28] 6월 8일 기사에 “전 참봉 이경창(李慶昌)이 상언(上言)하여 그의 아비 이억(李檍)이 병자년의 난을 당하여 병사 이의배(李義培)와 함께 적에게 죽었으니, 포가(褒嘉)의 은전 입기를 청하였는데, 예조에서 복주(覆奏)하여 정려(旌閭)와 증직(贈職)을 청하니, 윤허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 이억 장군 명정과 정려 건립은 이억의 아들 이경창(李慶昌)이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위치]

이억장군 정려예산군 봉산면 금치리마을에 있는 경로당 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산의 동북향 경사면 구릉 하단부에 북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변천]

이억장군 정려는 건립 이후 7대손 이용주(李容柱)에 의해 1858년(철종 8) 중수가 이루어졌다. 정려 내부에 걸린 비각기에 따르면 중수 후 1860년[철종 10] 후손들에 의해 비석이 세워진 것으로 보이나 현재 비석은 없다. 예조판서 홍문관 제학 동양(東陽) 신석우(申錫愚)가 찬하고, 안동김씨 김병지(金炳地)가 썼다. 『여지도서』에 정려받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형태]

이억장군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에 초익공 형식 건물이다. 겹처마에 맞배지붕 양식이며 정려의 4면은 홍살이 돌려져 있다. 정려의 양옆 박공 아래는 방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정려의 내부 중앙 상단에는 1702년 내려진 ‘충신 증 통정대부병조참의 이억지문(忠臣贈通政大夫兵曺參議李檍之門)’ 명정 현판이 있고, 뒤편에는 비각기와 정려 중수기가 걸려 있다. 정려 중수기에는 1858년 중수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7대손 이용주가 찬하고 8대손 이기호(李箕鎬)가 썼다. 크기는 가로 78㎝, 세로 22㎝이다. 정려 비각기는 1860년 신석우가 찬하고, 김병지가 썼다. 크기는 가로 100㎝, 세로 42㎝이다.

[현황]

이억장군 정려 주변은 20평[약 66㎡] 정도의 땅에 철책을 돌려 시설을 보호하고 있다. 정려 뒤쪽에는 이억의 가묘와 이억의 유품을 물고 왔다는 애마의 말무덤이 함께 있다.

[의의와 평가]

이억의 명정과 정려 건립은 이억의 행적과 함께 아들인 이경창이 명정을 위하여 노력한 모습을 보여 준다. 정려 내부의 중수기와 비각기를 통해 경주이씨 문중이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억장군 정려는 경주이씨 문중이 집안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정치적 활동과 사족 활동을 유추할 수 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