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618
한자 鄭治邦鄭海悅旌閭
이칭/별칭 상몽리 정씨 정려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몽2길 109-6[상몽리 459-13]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27년연표보기 - 정치방·정해열 정려 건립
현 소재지 정치방·정해열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몽2길 109-6[상몽리 459-13]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겹처마 맞배지붕
정면 칸수 2칸
측면 칸수 1칸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몽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무신 정치방의 충훈 행적과 일제강점기 효자 정해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개설]

정치방·정해열 정려는 충신 정치방(鄭治邦)과 효자 정해열(鄭海悅)[?~1928]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이다.

정려가 있는 예산군 고덕면 상몽리공산정씨가 대대로 거주하는 지역으로, 입향조는 호조참판에 증직된 정치방의 아버지 충정공(忠貞公) 정빈(鄭濱)이다. 정치방의 본관은 공산(公山), 자는 성민(聖敏), 호는 고은(高隱)이다. 정치방은 선전관을 지냈으며, 광해군 때 김류, 이귀 등이 1623년(광해군 15) 3월 일으킨 인조반정에 참여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정사원종의 일등공훈으로 녹훈되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1927년 정치방의 공을 길이 보존하기 위하여 충훈정려를 내렸다고 한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정해열의 본관은 공산(公山), 자는 노첨(魯瞻), 호는 금호(錦湖)로 참봉 벼슬을 지냈다. 입향조로 알려진 정빈의 둘째 아들 정태방의 8대손이다. 정해열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병이 있어 지성으로 간호하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어머니가 잉어와 미나리를 먹고 싶어 하였다. 겨울이라 들에 나가 얼음을 깨고 미나리를 캐는데 갑자기 잉어 서너 마리가 근처 연못에서 튀어나왔다. 잉어로 어머니를 봉양하니 병이 나았다. 이후 부모가 죽은 후에도 부모의 위엄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서 울고, 읍하는 것과 슬퍼함을 법도에 맞게 하였다. 빈소와 분묘를 집안 예법에 따라 지키고 삼년상을 치른 후에도 상복을 벗지 않아서 혈색이 검어지고,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고 한다. 정해열의 모습을 본 주위 유림들이 포상을 거론하여 1927년 경성(京城) 성묘(聖廟)로부터 효자로 표창받았다. 이때 정치방의 충신 정려도 논의되어 함께 포상을 받았다. 정해열은 정려를 받은 이듬해인 1928년 건강이 쇠약해져 사망하였다.

[위치]

정치방·정해열 정려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몽2길 109-6[상몽리 459-13]에 있다. 근처에 공산정씨의 묘역이 있고, 공산정씨 묘역에 정해열의 묘가 있다.

[형태]

정치방·정해열 정려는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 양식이다. 창방 위에는 각각 2개씩의 소로를 올리고 있으며 건물 양옆 박공 아래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내부에는 정치방의 충신 현판과 정치방의 동생 정태방의 8대손 정해열의 효자 현판이 함께 있다. 정치방의 정려 현판은 1927년 걸린 것으로 ‘충훈 증병조참판 충의공 공산 정치방 지문 공부자탄강 이사칠팔년 정묘 경성성묘건(忠勳贈兵曹參判忠毅公公山鄭治邦之門 孔夫子誕降二四七八年丁卯京城聖廟建)’이라고 적혀 있다. 정해열의 정려 현판도 1927년 걸린 것으로 ‘효자 참판 공산정해열지문 공부자탄강 이사칠팔년 정묘 경성성묘건(孝子參判 公山鄭海悅之門孔夫子誕降二四七八年丁卯京城聖廟建)’이라고 적혀 있다. 현판 아래에는 1927년 이윤종이 지은 ‘충신정려정충의공전’이 걸려 있으나 많이 훼손되어 있다. 정치방·정해열 정려 바로 옆에는 공산정씨 묘역이 자리하고 있는데, 위쪽에서부터 정해열·정수(鄭洙)·정용(鄭溶)·정신(鄭信)·정동표(鄭東杓)[정해열의 아들] 묘가 있다.

[의의와 평가]

정치방·정해열 정려는 유생들의 건의로 함께 만들어졌다. 정해열의 효행에 힘입어 내려진 정려는 선조 정치방의 정려까지 이끌어 냈다. 17세기 인물인 정치방이 20세기에 와서 정려를 받았기 때문에 정치방 정려는 당시 예산군에서 공산정씨 집안의 힘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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