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626
한자 韓氏孝子孝婦烈女三旌閭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마전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507년연표보기 - 공신옹주 정려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84년연표보기 - 한신묵과 한재건의 처 경주김씨 정려 추가
개축|증축 시기/일시 1515년 - 한씨 효자·효부·열녀 삼정려 정려각 보수
현 소재지 한씨 효자·효부·열녀 삼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마전리 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1칸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마전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왕족 공신옹주와 조선 후기의 효자 한신묵, 한재건의 처 경주김씨의 정려.

[개설]

한씨 효자·효부·열녀 삼정려는 한경침(韓景琛)[1482~1504]의 처 공신옹주(恭愼翁主)와 효자 한신묵(韓愼黙)[1785~1838], 한재건(韓在健)[1817~1871]의 처 경주김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한신묵의 아들인 한재인(韓在仁)[1803~1867]의 주도로 정려를 중건하였고, 정려를 중건할 당시 공신옹주 정려에 아버지 한신묵을 함께 명정하였다.

[위치]

예산군 대술면 소재지 남쪽으로 약 3㎞ 이동하면 마전리로 접어든다. 길을 따라 약 2㎞ 더 가면 마전리 중삼마을에 이른다. 한씨 효자·효부·열녀 삼정려는 마전교를 건너기 전 도로변의 들판에 있다.

[변천]

공신옹주는 성종과 귀인엄씨(貴人嚴氏)[?~1504] 사이에서 태어난 성종의 셋째 딸이다. 한명회(韓明澮)의 손자 청녕위(淸寧尉) 한경침과 혼인하여 시부모를 정성껏 섬겼다.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어머니 귀인엄씨가 죽임을 당하고, 옹주는 폐서인이 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유배되는 날 몰래 남편의 신주를 품고 가서 가시나무 울타리 속에 숨겨 두고 아침저녁으로 제사지냈고 끓인 죽이나 풀 열매까지도 반드시 신명에게 올린 뒤 먹었다고 한다. 중종반정 뒤에 공신옹주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1507년(중종 2) 6월 6일 명정하였고, 12월 절부정려가 세워졌다. 1515년 대사간 윤은보(尹殷輔)[1468~1544]의 건의로 무너진 정려각을 보수하고, 쌀과 콩 30석을 하사받았으며, 공신옹주의 절행을 『삼강행실속록(三綱行實續錄)』에 실었다. 이후에도 1518년 공신옹주에게 쌀과 콩을 하사하였고 1521년 귀양 가며 빼앗긴 인천의 삼목도(三木島)를 다시 하사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중종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공신옹주의 절행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등에도 실려 있다.

한신묵은 병환인 어머니가 겨울에 수박을 먹고 싶다고 하자 눈 속에서 수박을 찾아 어머니께 봉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잉어를 찾자 얼어붙은 호수에 무릎을 꿇고 천지신명께 빌었더니 신기하게도 잉어가 튀어나왔다. 잉어를 끓여 어머니에게 먹이고, 똥을 맛보아 병세를 진단하였다고 한다. 한신묵은 이러한 효행으로 교관에 증직되고 명정을 받았다.

한재인의 동생 한재건의 처 경주김씨도 병든 남편을 정성으로 돌보았으며, 남편이 죽자 자식을 잘 키운 행적이 인정되어 1884년(고종 21) 명정을 받았다.

[형태]

한씨 효자·효부·열녀 삼정려는 정면 3칸, 측면 1칸 형태로 기단은 석재와 시멘트로 쌓고 방형의 추석 위에 원기둥을 세운 뒤 맞배지붕을 올렸다. 양쪽 측면에는 방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현황]

한씨 효자·효부·열녀 삼정려 내부 중앙의 상단부에 현판 3개가 걸려 있다. 현판에는 왼쪽부터 ‘절부 순의대부 청령위한경침배 공신옹주지려 정덕이년정묘십이월 명정(節婦順義大夫淸寧尉韓景琛配恭愼翁主之閭正德二年丁卯十二月命旌)’, ‘효자 증동몽교관 조봉대부 한신묵지문 성상즉위이십일년갑신 팔월 명정(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韓愼黙之門 聖上卽位二十一年甲申八月命旌)’, ‘열녀 학생 한재건처 유인 경주김씨 지려 갑신 팔월 명정(烈女學生韓在健妻孺人慶州金氏之閭甲申八月命旌)’이라고 적혀 있다. 정려 앞쪽에는 1993년 세운 한재건의 처 경주김씨의 기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열녀 학생한재건처 유인 경주김씨 기적비(烈女學生韓在健妻孺人慶州金氏紀蹟碑)’라고 새겨져 있다.

공신옹주 정려는 원래 옹주가 아산에 거주하여 아산에 있었다고 하지만 정려와 옹주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추측만 할 뿐이다. 후손들에 따르면 정려가 후손을 따라 수차례 이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위치보다 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있었으나 화재로 인해 현재의 위치까지 옮겨 왔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한씨 효자·효부·열녀 삼정려는 300년의 세월을 두고 한 가문에서 세 명의 정려가 함께하는 보기 드문 사례이다. 특히 공신옹주의 정려는 이건되었을지라도 500년 넘는 세월 동안 보존되어 온 문화재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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