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강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681
한자 晉州姜氏
영어공식명칭 Jinju Kang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조선/조전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고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진주 - 경상남도 진주시
입향지 진주강씨 입향지 - 충청남도 예산군
성씨 시조 강이식(姜以式)
입향 시조 강선원

[정의]

강이식을 시조로 하고 강선원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예산의 세거 성씨.

[연원]

진주강씨(晉州姜氏)는 고구려 때 병마도원수를 지낸 강이식(姜以式)을 시조로 삼는다. 강이식은 598년(영양왕 9) 병마도원수로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요서 지방에 출정해 공을 세웠고 수나라 문제의 30만 대군을 맞아 임유관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진주강씨가 진주에 세거한 것은 8세 강우덕(姜友德)이 이거한 이후부터라고 한다. 고구려 멸망 이후 강씨 집안이 북방에서 남쪽인 진주(晉州)로 남하한 것은 신라의 삼국 통일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진주가 본관이 된 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강이식의 후손인 강진(姜縉)이 태중대부 판내의령을 지낸 이후 진양후(晉陽侯)로 봉해지면서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강우덕의 큰아버지인 강회백(姜淮伯)이 진양(晉陽)에 귀양 간 계기로 진주를 세거지로 하여 본관을 삼았다는 설도 있다.

[입향 경위]

고려 초 거란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강민첨(姜民瞻) 장군의 묘가 예산군 대술면에 있어서 고려 때부터 진주강씨가 예산 지역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하나, 기록상 진주강씨 예산 입향조는 조선 때의 인물인 강선원이다.

강선원의 예산 입향 후 진주강씨는 현감 강봉래(姜鳳來), 참봉 강후망(姜後望), 참판 강훈(姜薰), 효자 강사혁(姜師赫), 수군통제사 강굉량(姜宏亮), 군수 강태봉(姜泰奉)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성응기(成應基)의 아내 진주강씨의 열녀비는 신양면 귀곡리에, 김태벽(金泰壁)의 아내 진주강씨의 열녀정문은 예산읍 관작리에 있다. 박지영(朴枝榮)의 아내 효부 진주강씨 또한 예산 지역 진주강씨 출신이다.

[현황]

예산군의 진주강씨광시면 장신리에 39가구, 대흥면 대율리에 5가구 등이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1018년(현종 9) 거란의 3차 침입 때 대승을 거둔 강민첨 장군의 묘가 대술면 이티리에 있다. 강민첨장군묘는 1990년 12월 31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19호로 지정되었다. 강민첨 장군의 묘는 실전되었던 것을 1960년경에 다시 찾아 재실을 건립하는 등 정화 사업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강민첨 장군의 묘를 찾게 된 일화에 따르면 마을에 “장군지묘(將軍之墓)”라 쓰인 윗부분이 잘려나간 비석이 발견되고 얼마 후 마전리에 사는 농부가 윗부분을 찾게 되어 강민첨 장군의 묘소 자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진주강씨 족보에도 강민첨 장군 묘소의 위치가 “예산 감천동”이라고 쓰여 있는데, 강민첨 장군 묘역의 주변을 ‘이티리 감탕골’로 부르기도 한다.

강민첨 묘역 앞에는 홍문을 세워 놓았으며, 원형으로 조성되어 있는 묘의 앞에 석상이 있고 좌우에 문·무인석이 세워져 있다. 석상 바로 앞에는 석양 2기가 석상을 바라보고 좌우로 놓여 있는데 각각의 석양 뒤에는 동자상이 세워져 있다. 또 그 앞으로는 석등이 놓여 있으며 좌우에 석주가 세워져 있다.

신양면 귀곡리에는 성응기의 아내 강씨의 열녀비가 있는데, 성응기의 아내 진주강씨는 남편인 성응기가 죽었을 때 시름시름 앓다 약을 먹고 자결하여 남편을 따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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