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732
한자 李山海
이칭/별칭 여수(汝受),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문충(文忠),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상항방산로 319-50[방산리 산7-1]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조민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39년연표보기 - 이산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61년 - 이산해 식년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89년 - 이산해 영의정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이산해 파직
활동 시기/일시 1599년 - 이산해 영의정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0년 - 이산해 파직
활동 시기/일시 1601년 - 이산해 부원군 복직
몰년 시기/일시 1609년연표보기 - 이산해 사망
출생지 이산해 출생지 - 서울특별시
묘소|단소 이산해 묘소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상항방산로 319-50[방산리 산7-1]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이산해 사당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한산(韓山)
대표 관직 대사간|이조판서|우찬성|영의정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에 묘소와 사당이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문장가.

[개설]

이산해(李山海)[1539~1609]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선조 때 두 번이나 영의정에 올라 북인을 이끌었다.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에 꼽힐 정도로 문장과 서화에 두루 능하여 당대의 문인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가계]

이산해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장윤(李長潤)이고, 할아버지는 이치(李穉)이다.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이지번(李之蕃)이며, 어머니는 남수(南脩)의 딸 의령남씨(宜寧南氏)이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숙부이며,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둘째 사위이다.

[활동 사항]

이산해는 1539년(중종 34)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었다. 156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다. 이후 대사성, 도승지, 대사간, 대사헌, 각조의 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서예에 능하여 1562년 스물네 살의 젊은 나이에 명종의 명으로 경복궁의 편액 글씨를 쓰기도 하였고, 중국사신이 오면 원접사(遠接使)로 자주 파견되었다.

이산해는 1578년(선조 11) 사간원 대사간이 되어 서인인 윤두수, 윤근수, 윤현 등을 탄핵하였고, 1580년 병조참판에 이어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오르고, 다시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584년부터 1587년까지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1588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 무렵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영수로서 북인 세력을 이끌었고, 1589년 영의정에 올랐다. 1590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종계변무(宗系辨誣)[명나라 실록과 법전에 이성계의 가계가 잘못 기록되어 시정을 요청함]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책봉되었다. 1591년 좌의정이던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세자 책봉을 주장하자 정철을 비롯한 수많은 서인을 탄핵하여 북인의 권력을 확고히 다졌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산해는 선조를 모시고 피난길에 올랐으나 왜적 침입의 책임을 물어 도중에 파직되어 백의종군하며 왕을 호종하였다. 그 뒤 다시 탄핵을 받아 강원도 평해에 3년간 유배되었다. 1595년 복직하여 대제학을 겸하였고 북인이 분당할 때 대북파를 이끌었다. 1599년 다시 영의정에 오르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파직되었다. 1601년 부원군으로 복직되었지만 선조의 부탁에도 국정에 깊이 개입하지 않았다. 선조의 사망한 뒤 잠시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맡았다.

이산해는 말년에 사직하고 예산 근교의 신창으로 내려와 병을 치료하면서 산천을 유람하며 살다가 1609년(광해 1)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광해군은 이산해를 극진히 대접하여 죽은 후에도 직접 장례 일정을 챙기고 1611년에는 제수를 하사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치적 활동뿐만 아니라 문장과 서화로도 이름 높았다. 특히 서예에 능하여 초서 대자(大字)와 산수묵도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문장팔가에 들었다. 정철과도 교류하였으나 당파로 인해 멀어졌다. 한시에도 조예가 깊어 허균이 극에 달하였다고 칭송한바가 있다. 문집으로 『아계유고』가 있으며 친필 유품을 상당 수 남겼다.

[묘소]

이산해의 묘소와 신도비, 사당이 예산군 대술면 상항방산로 319-50[방산리 산7-1]에 있다. 이산해의 영정과 유품 일괄을 한산이씨 아계공파종회에서 보관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이산해는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산해를 기리는 사당이 1920년대에 건립되었다.

이용자 의견
지** '예산 이산해의 묘가 2010.12.30. 충청남도 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된 내용도 추가해주세요.
참고: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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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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