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744
한자 趙師錫
이칭/별칭 공거(公擧),만회(晩悔),만휴(晩休),향산(香山),나계(蘿溪)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고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32년연표보기 - 조사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62년 - 조사석 중광문과 을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66년 - 조사석 검열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72년 - 조사석 접위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75년 - 조사석 수원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80년 - 조사석 예조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87년 - 조사석 우의정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88년 - 조사석 좌의정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91년 - 조사석 고성으로 유배
몰년 시기/일시 1693년연표보기 - 조사석 사망
유배|이배지 조사석 유배지 - 경상남도 고성군
묘소|단소 조사석 묘소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갈신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양주(楊州)
대표 관직 예조판서|우의정|좌의정

[정의]

충청남도 예산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조사석(趙師錫)[1632~1693]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왕세자 책봉 하례에 참석하지 않은 죄로 고성(固城)에 유배되어 사망하였다.

[가계]

조사석의 본관은 양주(楊州)이며 자는 공거(公擧), 호는 만회(晩悔) 또는 만휴(晩休)·향산(香山)·나계(蘿溪)이고,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아버지는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이고, 어머니는 영의정 신흠(申欽)의 딸 평산신씨(平山申氏)이다. 영의정을 지낸 조태구(趙泰耈)가 아들이다.

[활동 사항]

조사석은 1662년(현종 3) 중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의 관직과 주서 등을 역임하였다. 1666년 사관(史官)인 검열이 되었고, 이어 봉교, 겸설서로 승진하였다. 사관으로 있을 때인 1667년 왕이 정태화(鄭太和)·홍명하(洪命下)·허적(許積)을 탄핵한 이숙(李肅)과 박증휘(朴增輝) 등 7명의 간관을 유배 보내면서 사관들에게 이를 사초에 기록하지 말 것을 명하였으나 거절하고 사초에 기록하였다. 이 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하였으나, 왕명이 곧 철회되어 복직하였다. 전적, 정언, 사서, 지평을 거쳐 1672년 접위관(接慰官)이 되어 동래에서 왜인을 접대하였다. 그 후 부교리, 헌납, 이조정랑을 거쳐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1675년(숙종 1년) 수원부사를 거쳐 황해도관찰사, 예조참의, 승지, 강원도관찰사, 충청도수사, 경기도관찰사, 이조참판,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고 1680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대사헌, 호조판서, 강화유수, 병조판서, 판의금부사, 우참관, 좌참관, 이조판서 등을 거쳐 1687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조사석은 1688년 좌의정이 되었는데, 이때 인조의 손자인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의 횡포를 논하다가 처벌된 박세채(朴世采)와 남구만(南九萬) 등을 변호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1689년 판돈령부사가 되고 이어 영돈령부사가 되었으나, 1691년 왕세자 책봉 하례에 참석하지 않은 죄로 고성에 유배되어 1693년 사망하였다.

[묘소]

조사석의 묘소는 예산군 대흥면 갈신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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