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758
한자 李湛
영어공식명칭 Lee Dam
이칭/별칭 중구(仲九),정존재(靜存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지곡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고수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0년연표보기 - 이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31년 - 이담 생원 진사과 합격
활동 시기/일시 1538년 - 이담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43년 - 이담 정언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45년 - 이담 서장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65년 - 이담 직첩 환수
활동 시기/일시 1566년 - 이담 사성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4년 - 이담 병조참의 임명
몰년 시기/일시 1575년연표보기 - 이담 사망
거주|이주지 이담 거주지 - 충청남도 예산군 지도보기
외가|처가 이담 처가 - 강원도 영월군
묘소|단소 이담 묘소 - 경기도 파주시 백운산
사당|배향지 회암서원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봉림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용인(龍仁)
대표 관직|경력 대사간|병조참의

[정의]

조선 전기 예산 지역에 거주하였던 문신.

[개설]

이담(李湛)[1510~1575]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의약·천문·산수·궁술에도 능했고 문장과 서화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가계]

이담의 본관은 용인(龍仁)이며 자는 중구(仲久), 호는 정존재(靜存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전라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이행검(李行儉)이며, 할아버지는 도승지로 추증된 이적(李績)이다. 아버지는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로 호조참판에 추증된 죽림거사(竹林居士) 이종유(李宗蕤)이며, 어머니는 성균관 전적을 지낸 엄효량(嚴孝良)의 딸 영월 엄씨(寧越嚴氏)이다. 부인인 경재(敬齋) 경세인(慶世仁)의 딸 청주 경씨(淸州慶氏)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창녕현감(昌寧縣監)을 지낸 이철용(李哲容)이고, 딸들은 지평(持平) 김온(金韞)과 현감 최담령(崔聃齡)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이담예산군 덕산면에 거주하였으며 일대에서 학덕이 높았던 유우(柳藕)의 문하가 되었다. 결혼 후에는 장인인 경세인에게 사사하며 식견을 넓혀 나갔다. 김굉필(金宏弼)에게도 배웠다. 이후 천문, 산술, 의약, 복서, 활쏘기, 말타기, 그리고 그림과 글씨까지 익혀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하였다.

이담은 1531년 생원 진사과에 합격하였으며,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수찬(修撰)·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중종 39)에 재능을 인정받아 사가독서(賜暇讀書)[조선 시대에,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하였으며, 이듬해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의 연경에 다녀왔다.

이담은 성품이 강직하여, 옳지 못한 것이 있으면 비록 대신들이라 할지라도 비행을 낱낱이 상소하여 논박하였다.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재상이었던 이기(李芑)의 비행을 일일이 들추어 조정에서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었다.

이담은 1545년(명종 즉위년) 공조정랑이 되었는데 김굉필의 문인이라 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관직을 박탈당하였으며, 1547년(명종 2) 일어난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경상남도 양산으로 유배되었다.

이담은 1551년(명종 6)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1552년(명종 7) 이기 일파가 조정에서 축출된 후 신원(伸寃)되었다. 이담은 1566년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을 거쳐 사성(司成)을 지냈으며, 선조 즉위와 함께 홍문관부응교로 천거되었다. 홍문관원으로 있으면서 이담은 조광조(趙光祖)에게 시호를 내려 학사들로 하여금 임금을 신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담의 말을 들은 선조는 조광조에게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전보다 학사들을 더욱 예우하였다. 그 후 이담은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어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편찬 사업이 끝난 해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이황(李滉)은 조정에 들어와 일하고 있으면서도 선조의 관심 밖에 있었다. 평소 이황의 학덕을 잘 알고 있던 이담은 “이황의 어짊과 학문이야말로 훗날 한 세대의 귀감이 될 것”이라며 중요 관직에 써 줄 것을 간청하였다.

1575년(선조 7) 병조참의로 있던 이담은 병이 들어 벼슬에서 물러나 있다가 이듬해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담의 저서로는 『독서연주(讀書鉛朱)』, 『정존수필(靜尊隨筆)』, 『정존재집(靜存齋集)』이 있다. 『선현유묵(先賢遺墨)』에도 이담의 간찰(簡札)[간지(簡紙)에 쓴 편지]이 실려 있다.

[묘소]

이담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백운산 남쪽 기슭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담예산군 봉산면 봉림리에 있었던 회암서원(晦巖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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