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808
한자 金漢鍾
영어공식명칭 Kim Han-jong
이칭/별칭 경애(敬愛),일우(一宇)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이성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3년 1월 14일연표보기 - 김한종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김한종 광복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17년 11월 - 김한종 친일 부호 장승원 처단에 가담
활동 시기/일시 1918년 1월 - 김한종 친일 도고면장 박용하 처단에 가담
활동 시기/일시 1918년 2월 - 김한종 일제 경찰에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20년 9월 11일 - 김한종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 확정
몰년 시기/일시 1921년 07월 08일연표보기 - 김한종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김한종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출생지 김한종 출생지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지도보기
활동지 김한종 활동지 - 충청남도 예산군
묘소 김한종 묘소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광복회 충청도지부장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한종(金漢鍾)[1883~1921]은 1906년 홍주의병에 참여하여 일제에 항전하였고, 일제강점기 광복회 충청도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가계]

김한종의 본관은 김령(金寧)이며 자는 경애(敬愛), 호는 일우(一宇)이다. 홍주의병에 참여한 김재정(金在貞)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김한종은 1883년(고종 20) 1월 14일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후 충청도 지역에서 국권 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916년 7월 김경태(金敬泰)·김재창(金在昶) 등과 조선총독 및 고관 암살을 모의하던 중 발각되어 피신하였는데, 이때 채기중(蔡基中)의 소개로 1917년 6월경 대구에서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朴尙鎭)을 만나 광복회에 가입하였다. 광복회는 1915년 7월 15일 대구에서 한말 의병전쟁 계열과 계몽운동 계열이 연합해 조직한 비밀결사였으며, 자금을 모집하고 군대를 양성해 독립전쟁을 벌인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김한종광복회에 가입한 후 충청도지부 조직에 착수하였다. 먼저 천안의 장두환을 가입시킨 뒤 예산·홍성·청양 지역을 중심으로 50여 명을 모집해 광복회 충청도지부를 결성하고 지부장을 맡았다. 김한종이 충청도 지부를 결성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아버지 김재정의 영향이 컸다. 김재정은 예산에서 서당을 차려 제자들에게 항일 구국 사상을 교육하던 중 1906년 봉기한 민종식(閔宗植)의 홍주의병에 소모장으로 참여하였다. 김재정의 영향을 받아 김한종을 비롯한 김재풍(金在豊)·김재창(金在昶)·김재철(金在哲)·김원묵(金元默) 등의 김령김씨(金寧金氏) 문중 인물들과 제자인 김상준(金商俊)·이재덕(李在德)이 충청도지부에 참여하였다.

김한종은 박상진·채기중(蔡基中)·우재룡(禹在龍)·이관구(李觀求) 등과 광복회 지휘부를 구성하고 광복회 활동에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총사령 박상진과 함께 만주 부사령으로 김좌진(金佐鎭)을 파견하였으며, 충청도 일대에 「고시문」을 발송해 자금을 모집하고, 예산·인천·연기에 미곡상으로 위장한 연락 거점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김한종광복회의 의협 투쟁에도 앞장서 경상도지부의 친일 부호 장승원 처단에도 참여했으며, 김경태·임세규(林世圭) 등과 친일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해 민족적 각성을 일깨우기도 했으나 1918년 2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1920년 9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1921년 7월 8일 총사령 박상진과 함께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묘소]

김한종의 묘소는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한종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07년 11월 2일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김한종의사기념관을 건립하여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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