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기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810
한자 馬驥賞
이칭/별칭 학순,용암(龍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용리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최명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7년연표보기 - 마기상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4년 - 마기상 덕산보통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11년 - 마기상 천도교 입교
활동 시기/일시 1914년 - 마기상 덕산보통학교 자퇴 후 천도교 홍성교구 공선원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마기상 독립선언서 운반책을 맡아 독립만세운동 확산에 기여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마기상 천도교 청년당 창립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마기상 천도교청년동맹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마기상 신간회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마기상 청우당’ 예산 대표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마기상 조선농민사 삼남구 선전원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마기상 천도교 신파의 행동을 비판하는 성명서 발표에 서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마기상 청우당 총무국장에 선출되어 반탁위원으로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53년 05월 02일연표보기 - 마기상 사망
출생지 마기상 출생지 -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용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마기상 거주지 -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용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종교인
성별
대표 경력 농민사 사장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예산 출신의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마기상(馬驥賞)[1897~1953]은 예산 지역에서 천도교 포교에 힘써 예산에 천도교가 전파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가계]

마기상의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학순, 호는 용암(龍菴)이다. 아버지는 내포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마준성이다.

[활동 사항]

마기상은 1897년 예산군 고덕면 용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용리서숙의 김사홍에게서 천자문과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천도교 4세 교조 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의 수제자인 화암(化菴) 최준모(崔俊模)에 의해 1911년 천도교에 입교한 후 본격적으로 동학사상을 배우고 민족독립운동의 입지를 세웠다. 1914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개탄하고 자퇴하여 천도교 홍성교구 공선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종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정태영·문병석·고운학·조인원과 함께 천도교 각 지방 교구 조직망을 통해 배포하였다. 이로써 홍성 지역과 예산·고덕·덕산 등에서 장날을 이용한 독립만세운동이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다. 1923년 천도교청년당 창립에 참여하였으며, 천도교 내 신·구파 분열이 일어나자 1926년 일제에 포섭된 최린 계열 청년당에 반대하는 구파 청년당원들의 모임인 천도교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예산 지역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천도교청년동맹원들은 6.10만세운동과 신간회 운동에 참여하는 등 비타협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마기상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예산지국장을 역임하며 순종의 인산일에 펼쳤던 6.10만세운동을 지역 운동으로 확산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예산 각 지역의 산봉우리에는 수천 명이 집결하여 상복을 입고 곡을 하며 의분을 달랬고, 정세 강연을 통해 독립 의지를 고취하였다고 한다. 1924년 홍성교구장을 역임하였고, 1927년 『중외일보』·『동아일보』·『조선일보』 삽교지국을 운영하며 신간회 활동에 가담해 7회 이상 예산경찰서에 피검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기도 하였다. 1928년부터 6년 동안 청우당 예산 대표로 활동하였는데, 1931년 청우당의 일체 사업을 결의하는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천도교의 농촌 계몽운동을 전개한 조선농민사 삼남구 선전원으로 활약하며 『계몽』·『조선농민』·『농민독본』·『농민』 등을 내포 지역에 보급하였고, 1930년 3월 『중외일보』 예산지국 기자로 재직 시 홍성공업전수학교 학생운동 주도 혐의로 피검되어 취조 후 석방되었다. 1932년 천도교 제4세 교주 박인호의 역사적 법통을 부인하고 신·구파의 분립을 초래한 신파의 최린과 정광조의 행동을 엄정히 비판하는 구파의 성명서 발표에 서명하여 신파의 분규 행태를 만천하에 폭로하기도 하였다. 또한 충남연합포덕대장으로 활동하며 홍성 종리원을 왕래하다 알게 된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에게 많은 농촌 계몽지를 제공해 줌으로써 윤봉길의 애국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1934년 천도교 홍성교구 현직원과 고덕금융조합 평의원으로 활약하였으며, 1939년 해월신사백년기념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마기상은 1945년 해방이 되자 청우당 총무국장에 선출되어 반탁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47년 농민사 사장을 거쳐 1949년 보국당감찰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귀향하여 1953년 5월 2일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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