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1039
한자 儒敎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소령

[정의]

충청남도 예산 지역에서 행해지는 공자의 사상과 관련한 학문과 의례 및 활동 일반.

[개설]

유교(儒敎)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주자(朱子) 등 유가(儒家)의 정치사상과 학문 수양, 그리고 의례 등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현세적 사상이자 종교이다. 유교에서는 후세에 공자와 그 제자들을 비롯한 성현을 제향하고 기념하는 성소로서 대성전(大成殿)과 같은 사우(祠宇)를 태학(太學)과 향교에 설치하거나, 선현을 추모하고 학문을 연마하기 위한 터전으로서 서원(書院)을 세우는 등의 방법으로 유교의 가르침을 폈다.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우리나라에 유교가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예산이 속해 있던 백제는 행정관서 등을 제정하면서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3세기 고이왕 대에 중앙관제를 육좌평(六佐平) 16관계(十六官階)로 제정하였는데, 이는 『주례(周禮)』의 6관제(六官制)에 상응하는 것이다.

백제의 사서 편찬과 학문적 사상에서도 유교와의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4세기 경 백제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국사(國史) 『서기(書記)』를 편찬하게 했는데, 여기에서 보이는 박사의 칭호로 보아 당시 이미 대학 제도와 전문 학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강례박사(講禮博士)를 청해 오게 하여 당시 이미 유교의 경전 사상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산 지역도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시원적이나마 유교 교육이 실행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 의하면 당시 정치 이념의 근간을 유교에서 구하고 있는데, 이러한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되었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시작하였고, 성종은 유교를 기반으로 한 정치체계를 구축하였다. 12세기 인종 대에는 학교 교육을 더욱 공고히 하여 국자감에는 육학(六學)을 두고, 지방의 주·군·현에는 향학(鄕學)을 두었다. 예산 지역도 이러한 향학이 설치되어 국가 정책에 따른 유교 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우리나라의 초창기 주자학을 체계화시킨 이곡(李穀)·이색(李穡) 부자가 예산과 가까운 서천 한산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예산 지역도 주자 성리학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하여 예산에서는 고려 말~조선 초에 절개를 지켜 예산에 은거했던 관인 박유(朴愈)[?~?], 박인우(朴麟祐)[1338~1410] 등의 인물을 배출하기에 이른다. 또한 대흥현에는 이성만·이순 형제가 대표적인 효자로 이름 높았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와 예산의 성리학 연구와 교육 및 관련 활동 일반은 더욱 활발해졌다. 조선 왕조가 창건되자 1398년 성균관(成均館)을 세우고, 문묘에는 중국의 제현과 우리나라의 제현을 제향하였다. 그리고 지방 부·목·군·현에도 향교(鄕校)를 1개교씩 설치해 교수 또는 훈도를 두었으며, 교생의 정원은 부·목 90명, 도호부 70명, 군 50명, 현 30명으로 하였다.

예산 지역에도 역시 향교를 운영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예산향교는 현에서 동쪽으로 1리[약 0.39㎞

]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고, “덕산향교는 현에서 서쪽으로 5리[약 1.96㎞ ]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으며, “대흥향교는 현에서 북쪽으로 3리[약 1.18㎞] 떨어져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즉, 조선 전기부터 예산 지역에 속한 세 현 모두 향교가 건립되어 유교교육을 실시하였다.

예산 지역의 사립 유교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서원·사우는 1600년 건립된 목은영당(牧隱影堂)[이색 제향]과, 1705년 건립된 덕잠서원(德岑書院)[김구(金絿) 제향], 1708년 건립된 우천사(牛泉祠)[이약수(李若水) 제향], 1709년 건립된 회암서원(晦庵書院)[주자·이담(李湛)·조극선(趙克善)·이흡(李洽)·안민학(安敏學) 제향], 18세기 건립된 세덕사(世德祠)[박국검(朴鞠儉)·박천성(朴天成) 제향]가 있다.

예산 지역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국난이 있을 때마다 많은 충신들이 활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거느리고 송현에서 전투하다 순국한 한순(韓楯)[1555~1592]이 덕산 사람이다. 이억(李檍)[1615~1636]은 덕산 사람으로 병자호란에 충청도 병마절도사인 이의배 지휘 하에 전투에 참여하였고, 광주 쌍령에서 적을 만나 싸우다 전사하였다.

유교의 영향을 받은 효자와 열녀의 배출도 많았다. 덕산현의 대표적인 효자로는 신효(申皛)[1584~1660]가 있다. 예산현에는 절부 한경침, 효자 한신묵 등이 명정을 받았다. 열녀로 박근(朴根) 처 현풍곽씨와 영조의 차녀이자 조선 왕실 내 유일한 열녀인 화순옹주를 들 수 있다.

[현황]

예산의 실존 인물인 이성만·이순 형제의 우애와 효행을 다룬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예산에서는 이성만·이순형제의 행적을 기리고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의좋은형제공원을 조성하였고 의좋은형제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예산군에는 자암 김구, 추사 김정희, 수당 이남규, 포저 조익,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등 유교 인물의 관련 유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후손과 예산모현사업회 등에서 선양사업을 지속하는 것은 물론, 예산군과 충청남도는 ‘충청 유교문화권’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이러한 유교 자원을 활용할 계획이다. 이외에 예산·대흥·덕산향교와 유림단체는 전통을 계승하여 석전제, 향사례, 전통혼례, 기로연, 효교실 등 다양한 교육·문화·가족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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