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1040
한자 鄕校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정의]

조선시대에 예산 지역의 유학을 교육하고 장려하기 위하여 설립, 운영하였던 관학 교육기관.

[개설]

향교는 지방 교육을 담당한 국립 교육 기관으로 고려 전기부터 지방에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세워지기 시작하여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 지방마다 설립된 관립(官立) 교육 기관이다. 이를 교궁(校宮)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하였는데, 오늘날의 국공립 중고등학교와 비슷하다. 향교는 학생들의 교육뿐 아니라, 여러 가지 제사를 지내고, 지방 백성들의 교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향교는 소과(小科)에 응시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이었는데, 조선 후기 임진왜란 등의 변란과 사학 교육기관인 서원의 발흥으로 인해 교육 기능이 점차 쇠퇴하였다.

현재의 예산 지역 일대에는 대흥·덕산·예산향교의 총 3개 향교가 건립되었고 정확한 건립 시기는 확인할 수 없다. 대흥향교의 경우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었다고 구전되고 있고, 덕산향교예산향교는 알 수 없다. 다만 향교 진흥책이 시행된 이후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입학 자격과 교과 과정]

향교는 16세 이상의 양반 자제 또는 향리의 입학을 원칙으로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향교의 구성원은 도호부(都護府) 이상의 지역에는 종 6품 이상의 교수, 군(郡) 이하에는 7품 이하의 훈도를 각각 파견하였다. 유생 정원은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에는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에는 50명, 기장과 같은 현에는 30명이었다.

향교의 교과 과정은 『소학(小學)』을 비롯하여 사서오경이 주가 되었고, 『성리대전(性理大典)』, 『근사록(近思錄)』 등의 주자학과 역사책 등이 추가되었다.

[건물의 구성과 배치]

향교의 배치는 배향 공간과 강학 공간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누어지고, 이 밖에 일부 변형된 배치 방법들도 있다. 향교가 자리 잡은 대지가 평지인 경우는 전면이 배향 공간이 오고 후면에 강학 공간이 오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이루고 있으나, 대지가 구릉을 낀 경사진 터이면 높은 뒤쪽에 배향 공간을 두고 전면 낮은 터에 강학 공간을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룬다. 예산의 향교는 모두 전학후묘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강학 공간은 명륜당(明倫堂)과 기숙 공간인 동재(東齋)·서재(西齋)로 구성되어 있다. 제향 공간은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가 있으며, 대성전은 문묘(文廟)를 일컫는다. 문묘에는 공자 이래 춘추 전국 시대의 성현과 유학을 성리 철학으로 진전시킨 송나라 주돈이·정이·정호·주자, 그리고 우리나라의 현인을 배향하였다.

[예산군의 향교]

지금의 예산은 대흥현, 덕산현, 예산현을 통합한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각각의 현으로 존재하였다. 향교의 경우 각 현에 한 개의 향교를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예산에는 총 3개의 향교가 남아 있다.

1. 예산향교

예산향교예산군 예산읍 향천리에 있다. 마을 뒤편 구릉사면 하단부에 있다. 1413년(태종 13) 향교 진흥책이 실시되던 시기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학교등록』과 같은 조선 후기 자료를 통해 중수 기록 등을 확인할 수 있으며, 「대성전중수기」 등 여러 중수 기록이 남아 있어 사실 확인이 가능하다. 예산향교는 그 형태와 역사를 잘 보존하고 있으며, 많은 문서류와 현판류가 남아 있다.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38호로 지정되었다.

2. 대흥향교

대흥향교대흥면 교촌리에 있다. 교촌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향교말마을 북쪽 계곡 안쪽에 있으며,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었다고 구전되고 있다. 다만 본래 현 위치보다 약 50m 북쪽 기슭에 건립되었던 것을 1591년(선조 24) 지금의 자리에 이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수차례 중수와 보수를 하였다.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3. 덕산향교

덕산향교예산군 덕산면 사동리에 있다. 마을 북쪽 가야산 자락에 있다. 군·현에 향교가 건립되기 시작한 1413년(태종 13)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차례 중수를 한 것으로 보이며, 1682년(숙종 8)의 「대성전 중건상량문」이 최초의 중수 확인 기록이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개·보수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도유사록」[1695~1909년]에 역대 도유사 116명 명단 외 3건이 있으며, 현판류는 향교의 중수 및 교임 성명 등 이 기록되어 있는 게판(揭板)[시문(詩文)을 새겨 누각에 걸어 두는 나무 판] 외 7건이 있다.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평가와 의의]

조선은 신분제 사회로 향교에서 교육의 기회를 받을 수 있는 신분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16세기에 오면서 향교는 군역을 담당할 농민, 양민들이 교생이 되었다. 지방에 있는 향교는 기층신분인 평민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일정한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관한 반대하는 세력도 있으나 조선 초기부터 농민들에게 향교 입학을 허락했던 사례가 있었고, 16세기에 와서 실록 자료에 교생의 신분을 양반으로 한정지으려고 하는 주장이 보이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례가 많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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