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1048
한자 大興鄕校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교촌향교길 88[교촌리 538]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소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405년연표보기 - 대흥향교 건립
이전 시기/일시 1591년연표보기 - 대흥향교 이건
문화재 지정 일시 1997년 12월 23일연표보기 - 대흥향교 충청남도 기념물 제136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대흥향교 충청남도 기념물 재지정
현 소재지 대흥향교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교촌향교길 88[교촌리 538]지도보기
성격 향교
양식 전학후묘
면적 3,464㎡
관리자 대흥향교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기념물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교촌리에 있는 조선 전기에 세운 향교.

[개설]

대흥향교는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며, 지방민을 교화하기 위해 1405년(태종 5) 설립되었다. 향교는 조선시대 국립 중등 교육기관이다. 대흥향교는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3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대흥향교는 1405년 현 위치보다 약 50m 북쪽 기슭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향교가 건립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고, 현재 위치로 이건되기 이전의 중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현 위치로 이건된 것은 1835년(헌종 1) 대성전 중수 기록인 「대성전중수기」 서두에 200여 년 전 신묘년에 향교를 이건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1591년(선조 24) 이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건 이후 조선 후기에 수차례 중수와 보수가 있었음은 예조의 기록인 『학교등록(學校謄錄)』과 중수 현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668년(현종 9) 향교 위판 교정과 19세기 이후의 중보수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치]

대흥면 소재지인 교촌리에서 북쪽으로 향교말마을이 있다. 대흥향교는 향교말마을의 북쪽 계곡 안쪽에 있다.

[형태]

대흥향교의 건축구조는 전학후묘(前學後廟)식 배치이다. 앞쪽의 계단을 오르면 외삼문이 있고 좁은 앞마당을 두고 한 단 높은 대지 중심에 명륜당을 배치하였다. 명륜당 동서쪽에 각각 동재와 서재를 배치하였는데 양재는 경사지를 이용하면서 남측의 반은 누마루이고 북측의 반은 지면에 닿게 만든 건물이다. 명륜당 후면에는 후정을 두고 다시 한 단 높은 대지 위를 묘당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묘당 공간에는 내삼문이 있고 중정을 중심으로 북쪽에 대성전을 배치한 다음 동서쪽에 각각 동무와 서무를 배치하였다. 향교 동쪽에는 별도의 구획으로 수직사와 전교실을 배치하였다. 대흥향교는 전체를 3개의 공간으로 나누고 공간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시켰다.

[현황]

대흥항교 앞에는 2000년 세워진 전교 안성노(安星老)[1899~?]의 공적비와 2008년 세워진 전교 조병언(趙丙彦)의 공적비가 있다. 안성노는 순흥인으로 자는 영수(永壽), 호는 성암(醒庵)으로 문성공 안유(安裕)의 24세손으로 신양면 여래미리에서 태어났다. 자라면서 한학을 열심히 공부하였고, 평소 심성이 청백하고 모든 일에 주도면밀하게 대처하여 일에 빈틈이 없었으며, 부모에 대한 효심까지 지극하여 주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추앙을 받았다. 1957년 대흥향교 전교가 되었는데, 예수저수지 수몰과 농경지 개혁으로 인하여 향교의 전답이 분배되고 향교의 재정 상태가 약화되어 봄과 가을 제례를 자주 치르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모금 운동을 벌여 향교와 담장을 보수하고 남은 돈으로 전답 654평[약 2,161㎡]을 다시 얻어, 마침내 제례를 다시 치를 수 있게 되었다. 1969년 권중해(權重海) 성균관장으로부터 성균장이 수여되었다. 2000년 전교 조병언을 중심으로 대흥향교 유림회에서 공적비문을 짓고 비를 세웠다.

안성노 공적비 오른쪽으로는 2008년 세워진 전교 조병언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조병언은 포저 조익의 후손으로 서울대학교 공학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공직에서 퇴직 후 고향에 돌아와 향교 전교를 맡고 유도회장직을 겸하였고, 이후 수차례에 걸쳐 보수와 수목을 심어 오늘날의 대흥향교로 만들었다. 조병언의 공을 높이 사 유림회에서 2008년 공적비를 세웠다.

대흥향교의 소장 문서로는 대흥향교 유생안인 『청금록』 5책, 동재 유생들이 회합하여 만든 「입의(立議)」[1848년 추정]가 있다. 대흥향교에는 1800년대 만들어진 현판 4종이 전하는데, 1810년 대성전과 명륜당, 동서재 중수 사실이 기록된 ‘교궁중수기’, 1835년 서두에서 200여 년 전 향교 이건 사실을 기록한 ‘대성전중수기’, 각 향교마다 동일한 등서 게판 자료인 ‘관문게판’[1872], 참판 장윤식의 재정 지원 후 폐단을 막기 위해 지은 ‘폐단절목’[1891]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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