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1050
한자 禮山鄕校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교길 31[향천리 132-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소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413년연표보기 - 예산향교 건립 추정
개축|증축 시기/일시 1720년 - 예산향교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785년 - 예산향교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812년 - 예산향교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857년 - 예산향교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888년 - 예산향교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5년 - 예산향교 동재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6년 - 예산향교 서재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7년 - 예산향교 내삼문, 계단, 축대, 담장 및 교궁 경내 개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95년 - 예산향교 중수
문화재 지정 일시 1997년 12월 23일연표보기 - 예산향교 충청남도 기념물 제138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예산향교 충청남도 기념물 재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1684년연표보기 - 예산향교 화재
현 소재지 예산향교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교길 31[향천리 132-1]지도보기
원소재지 예산향교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관작리석양리 사이지도보기
성격 향교
양식 전학후묘
면적 2,731㎡
관리자 예산향교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기념물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에 있는 향교.

[개설]

예산향교는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며, 지방민을 교화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예산향교의 정확한 건립 시기는 확인할 수 없지만 조선 초 각 지방 군현에 향교들이 건립될 때인 1413년(태종 13)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3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예산향교는 조선 초 각 지방 군현에 향교들이 건립될 때인 1413년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 이후 조선 전기에 몇 차례 중수와 보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자료는 모두 조선 후기의 자료이다.

최초의 중수 기록은 『학교등록』 1684년(숙종 10) 기사이다. 당시 예산향교는 화재로 인하여 대성전과 5성 8현의 위판(位版)이 소실되었는데, 이에 대한 사후 조처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향교 화재 및 향교의 개건 논의와 관련하여서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684년 7월 10일조에 자세히 나오는데, 조정의 논의 끝에 개건의 건의가 일축되었던 사실과 당시 화재 배경에 대한 조정 중신들의 혐의가 적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화재로 인한 중수가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밝히기 어렵지만 그 사이에 중수가 이루어졌음은 분명하다.

1720년(숙종 46) 예산향교의 대성전 및 동·서무가 비가 새어 중수하였다는 내용이 『학교등록』에 나온다. 또한 1721년(경종 1) 충청감사 조영복(趙榮福)이 계를 올려 “예산향교는 송조 4현 및 신라·고려 4현만을 대성전 안에 봉안하고 조선 8현을 동·서무에 병향하고 있어 이를 고쳐 봉안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조정에서는 이를 윤허하였다.”라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후 중수 기록은 1785년(정조 9) 「대성전중수기」[현감 권기헌(權基憲) 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없는 2개의 중수 기록이 현판으로 확인된다. 하나는 임신년의 향교중수기[현감 이순겸(李純謙) 기]이고, 다른 하나는 정사년의 문묘중수기[현감 조희갑(趙羲甲) 식]이다. 기록에 보이는 현감들의 재임 연대는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와 『호서읍지(湖西邑誌)』의 예산현 읍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읍지류에 기록된 현감선생안을 보면 마지막으로 기록된 예산현감 안종수가 1765년 부임하여 1769년 이임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현감선생안에서 두 현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이후 부임하였던 인물들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769년 이후의 임신년은 1812년, 1872년 중의 하나일 것이고 정사년은 1857년, 1917년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중 현감 권기헌 때에 “대성전이 무너질 정도로 퇴락하여 중수하였다.”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정사년의 문묘중수[현감 조희갑]는 1857년이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또 1872년 임신년의 경우도 16년 뒤인 1888년[고종 25] 현감 이시우(李時宇)에 의한 향교 중수에서 향교가 무너질 지경이어서 중수하였다고 한 것을 미루어 보면 16년 사이에 향교가 퇴락하였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임신년의 향교 중수[현감 이순겸]도 1812년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1812년(순조 12)의 향교 중수는 임신년 중수기[현감 이순겸 기]에 의하면 대성전과 명륜당이 황폐하여 근심으로 생각하다가 3개월에 걸쳐 공사가 끝났으며, 이와 함께 향교의 제기와 학전을 마련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1857년(철종 8)의 문묘중수기[현감 조희갑 식]에 의하면 당시 대성전이 무너져 비가 샐 정도였으므로 현감이 고을 유생들과 힘을 합쳐 천금을 모아 이해 봄부터 가을까지 역사를 진행하여 전각(殿閣), 당계(堂階), 담장, 명륜당, 서재실, 그리고 상탁(床卓)과 제기를 수리·보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83년(고종 20) 있었던 소규모의 중수와 1888년 2월 현감 이시우에 의한 중수가 있었다. 1887년 부임한 현감 이시우는 향교가 무너져 학생들이 강학을 할 수 없게 되자 지역 유생들과 의논하여 1888년 2월 초 중수의 역사를 시작하여 대성전과 동·서재를 중수하였다. 그리고 장훈(掌訓) 1명과 학도(學徒) 10명을 선정하여 학업에 정진하게 하였는데, 이를 위한 양현의 자산으로 이시우는 자신의 봉름 18석을 지원하여 거접의 비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은 1888년 2월 『흥학절목(興學節目)』에 자세히 나온다. 이후 일제강점기의 중수 기록은 자세하지 않고 해방 이후 중수는 1975년 동재 중수, 1976년 서재 중수, 1977년 내삼문 중수, 1983년 내삼문, 계단, 축대, 담장 및 교궁 경내 개수 등을 거쳐, 1995년 또 한 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졌다.

[위치]

예산향교예산군청에서 북동쪽으로 약 1㎞ 떨어진 예산읍 향천리 뒷편 구릉사면 하단부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현에서 동쪽으로 1리[약 0.39㎞] 떨어져 있다[在縣東一里].”라는 기록과 일치한다. 그러나 예산향교의 원래 위치는 현재의 향교에서 북쪽 계곡으로 1㎞ 정도 올라간 지점[예산읍 관작리석양리 사이]에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당시의 향교 흔적을 보여 주는 유적이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으며, 현재의 위치로 옮긴 정확한 연대도 알 수 없다.

[형태]

예산향교는 마을을 앞에 두고 구릉지에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앞면에 강학 공간을 두고 후면에 묘당 공간을 배치한 전학후묘식으로 구릉지의 일반적인 배치 형태를 보여 준다. 향교 입구에는 외삼문을 두지 않은 채 높은 계단을 두었다. 계단을 오르면 명륜당이 가운데에 있고 좌우에 동재와 서재의 측면이 명륜당과 전면 열을 나란히 하고 있다. 향교 내부로의 진입은 명륜당과 동재와 사이에 있는 중문을 통해 들어간다. 들어서면 명륜당 후정(後庭)이 나오고 후정의 동서로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다. 세 개의 건물은 후정을 중심으로 ⊔자 모양을 하고 있다. 후정 뒤로는 다시 계단을 두고 한 단을 높인 대지 위에 대성전을 두었다. 대성전이 있는 묘당 공간은 앞쪽에 내삼문을 두고 주위를 담으로 둘러 일곽을 형성하였다.

[현황]

예산향교에서는 매년 2월과 8월에 석전제를 올리고 있으며, 매 삭망일에 향전 의식을 봉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예산향교는 조선 전기에 건립된 향교로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으나 형태와 역사를 잘 보존하고 있다. 또한 많은 문서류와 현판류가 남아 있어 향교의 운영 실태, 관리 및 당시 지역민들과의 관계 등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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