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1090
한자 天道敎
분야 종교/신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명진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활동하고 있는, 최제우를 교조로 하는 신종교.

[개설]

예산군에는 신종교로서 동학(東學) 태동기부터 신도들이 있었다. 1860년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가 동학을 창시하였고 1905년 3대 교주 손병희가 천도교(天道敎)로 개명하였다. 예산군에는 박인호(朴寅浩)[1855~1940]부터 현재의 신도에 이르기까지 동학 및 천도교 신앙의 맥이 이어져 왔다. 동학·천도교의 기본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요약하라면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사람을 한울님 섬기듯 섬기어라’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사상이 그것이다.

[변천]

동학은 대신사(大神師) 최제우가 창시하여, 신사(神師) 최시형(崔時亨)[1827~1898], 성사(聖師) 손병희(孫秉熙)[1861~1922], 상사(上師) 박인호로 그 지도자의 맥이 이어졌다. 박인호는 예산 사람이었다.

1860년에 민족종교로 태어난 동학은 경상도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학의 첫 번째 주요 무대로 등장한 곳은 충청도였고 이어서 전라도로 확산되었다. 그 후 1894년에 전봉준의 주도 아래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전라도에서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은 충청도까지 파급되었고, 예산 일대의 동학교도들은 적극 호응하였다. 당시에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동학의 정신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동학은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손병희는 항일독립운동인 1919년 3.1운동을 주도하였다. 동학·천도교의 제4대 지도자인 예산 출신 박인호는 3.1운동 당시 손병희를 도우며 적극 참여하였다.

한편, 천도교 예산교구는 1910년대에 설립되었으며, 첫 교당 위치는 현 예산문예회관 근처였다. 예산교구의 교당은 일제강점기에 예산읍내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 충청남도 태안 출신인 이성천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이후 여러 곳에 피신을 다녔다. 이성천은 1914년에 신암면 무한천변에서 일본인과 괴한 3인에 의해서 피살되었다. 이성천의 큰 아들인 이동춘[이용우의 큰아버지]이 예산교구 교구장을 맡아오다가 1965년부터 수암(守菴) 이용우(李龍宇)가 교구장을 넘겨받았다.

예산교구 교당은 광복 이후에 예산읍 임성동주교리 등으로 이전하다가 1965년부터 이용우의 자택에 있었으나 2017년 예산읍 산성리로 이전하였다. 이용우의 구술에 의하면, 예산교구는 1972년 교구장 이용우 등이 주도하여 용담연원회를 결성하며 천도교 중앙총부와 한때 갈등하기도 했으나 이후 해소되었고 2017년 예산교구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현황]

천도교 예산교구 교당은 2017년 예산읍 산성리 336으로 이전하였으며 예산교구추진위원회 위원장은 박성묵이 맡고 있다. 예산읍에는 간양리를 중심으로 교인들 50여 명이 모여 산다고 한다. 1894년 10월 27일 예산읍 관작리에서 벌어진 동학군과 관군과의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2010년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을 조성하였다.

[의의와 평가]

천도교 예산교구는 일제강점기 전후 항일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민족종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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