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1124
한자 李應魯巖角畵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작품/미술과 공예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산41-4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창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작가 생년 시기/일시 1904년 - 「이응로 암각화」 이응로 출생
작가 몰년 시기/일시 1989년 - 「이응로 암각화」 이응로 사망
창작 시기/일시 1969년연표보기 - 「이응로 암각화」 창작
문화재 지정 일시 1996년 11월 30일 - 「이응로 암각화」포함된 이응로 선생 사적지 충청남도 기념물 103호로 지정
소장처 이응로 선생 사적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산41-4 지도보기
성격 예술작품
작가 이응로
재질 화강암 바위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기념물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에 있는 수덕여관 앞 바위에 이응로가 새긴 그림.

[개설]

이응로(李應魯)[1904~1989]는 동양화의 필획을 섭렵한 후 동양의 문인화에서 보이는 사의적(寫意的) 예술 세계를 추상 형식과 접목시켜 세계적 명성을 쌓은 화가이다. 호는 고암(顧菴)·죽사(竹士)이다. 1904년 예산에서 출생, 1920년 서화가 송태희(宋泰會)[1872~1941]에게 사사하고 1924년 해강(海崗) 김규진(金奎鎭)[1868~1933]의 문하에 들어가 서예, 사군자, 묵화 등을 배웠다. 이후 1935년 일본으로 가서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學校]와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桂月]의 덴코화숙[天香畵塾]에서 수학하고, 혼고[本鄕]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 기법을 공부하였다. 해방 후 1958년까지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하였으며, 1948년 홍익대학교 주임교수로 있었다. 1958년 프랑스에서 개인전을 연 후 서독에서 체류하다가 1960년에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여 작품 활동을 하였다. 또 1964년에는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여 동양 예술을 서구에 알리는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1967년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대규모 공안 사건인 동백림사건[2006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조사 결과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조작한 사건으로 밝혀짐]에 연루되어 복역하고 난 뒤, 다시 프랑스로 가서 미술 활동을 이어 나가다 1989년 타계하였다.

이응로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접경지인 충청남도 예산군과 홍성군 사이에 논란이 있었다.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와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를 각각 출생지로 주장하여 벌어진 일인데, 2008년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에서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 산24번지’로 기록되어 있던 제적부상 출생지를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 386번지’로 정정할 것을 허가하여 홍성군에서 시행하던 이응로생가복원 및 기념관건립사업이 계속 추진되어 완공되었다. 다만 이응로 생전에 발간된 도록, 기사 등의 연보에는 일관되게 ‘1904년 충청남도 예산 출생’으로 되어 있고, 생전의 인터뷰 기록에도 예산 출생으로 되어 있으나 타계 이후의 기록들은 홍성으로 기재되기 시작하였다. 출생지로 주장된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와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는 바로 이웃해 있는 곳이어서 당시에는 사실상 같은 지역이었다. 1995년 예산문화원에서 만든 『예산 지명 유래』를 보면 “낙상리는 본래 덕산군 나박소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상탄리, 낙천리와 홍주군 고남하도면의 갈오리, 원성리의 각 일부와 홍주군 홍천면의 중리[현재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낙천과 상천의 이름을 따서 낙상리라 하여 예산군 덕산면에 편입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형태]

「이응로 암각화(李應魯巖角畵)」는 화강암 바위에 새겨진 추상적 문양의 조각이다.

[내용]

「이응로 암각화」는 삼라만상의 성함과 쇠함을 추상화하여 화강암 바위에 새겨 표현한 작품이다. 이응로가 1944년 구입하여 6.25전쟁 때 피난처로도 사용하고 이후에도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던 수덕여관과 함께 충청남도 기념물 103호 ‘이응로 선생 사적지(李應魯先生事蹟地)’로 지정되어 있다. 수묵 산수화, 한지 콜라주, 문자 추상, 군상(群像) 등 시대적으로 변천하던 이응로의 작품군 중 문자 추상에 속하는 작품이다. 동아시아 특유의 예술 장르인 서예는 그림에서부터 출발한 상형문자가 보여 주는 아름다운 미적 감각을 갖게 되는데, 거기에서 순수 조형 형태를 뽑아 내어 미적 감각을 극대화하였다. 작품의 연원이 되는 글자가 무엇일지는 알 수 없으나 평평하고 너른 바위에 글자인 듯 그림인 듯 새겨진 암각화가 보이는 여백과 조형 요소가 주변의 풍광과 어울려 미적 감흥을 불러낸다.

[특징]

「이응로 암각화」는 국내는 물론 프랑스와 유럽 화단에 큰 영향을 미친 대가로 평가받는 이응로가 동양의 사의적(寫意的)인 서화 개념을 서양의 추상적인 표현과 접목하여 표현한 문자 추상 작품이다.

[의의와 평가]

「이응로 암각화」는 동양 미술의 우수성을 널리 알린 이응로가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한 옥고를 치른 후, 뿌리를 두었던 예산에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남긴 예술 작품이다. ‘1969 이응노 그림’이라는 서명이 남아 있으며, 고향에 마지막으로 남긴 예술적 선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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