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교육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1145
한자 近代敎育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노재준

[정의]

구한말에서 8.15해방 이전까지 충청남도 예산군 지역에서 이루어진 근대식 교육.

[개설]

한국의 근대 교육은 일반적으로 개항이 시작된 1876년대부터 1945년 해방까지 각종 근대식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육을 말한다. 강화도조약 이후 정부는 수신사(修信使)·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영선사(領選使) 파견, 서양인 교사 초빙, 1883년 동문학(同文學) 설치,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한 학부아문(學部衙門) 설치, 1895년 교육입국조서 발표 등 근대적인 교육 제도 실시를 통한 자주 국가 건설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국내 민간 선각자들과 기독교 선교사에 의한 근대 학교 설립이 활발하게 펼쳐진 결과 1908년경 전국에 4,000~5,000개교의 사립학교가 설립되었고, 이후 일본 통감부의 억제책에도 불구하고 1910년에 학부(學部)[대한제국 때에 교육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설립 인가를 받은 학교 수가 2,250개교에 이르렀다.

[변천]

1895년 고종은 갑오경장과 더불어 교육입국조서를 내려 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후 1910년 한일병합에 이르는 시기까지 선각자들에 의해 근대적인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시기 충청남도 예산군 지역은 국립학교나 공립학교는 없었으나 다른 지역에 비해 신교육의 보급이 일찍 진행되었다. 이는 바다와 인접한 지리적 요인과 더불어, 일찍이 천주교와 기독교의 전래와 수용 등의 영향으로 인한 실학사상을 가진 지식인의 존재, 예당평야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미곡의 유통으로 형성된 경제적 역량 등이 작용한 결과라고 본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5년 명신학교[덕산 지역 김동욱 설립], 1906년 덕풍학교[예산 지역 유지 설립], 1908년 배영학교, 1909년 동일연성학교와 흥남학교[대흥 지역과 예산 지역 유지와 신사에 의해 설립]가 있었다. 그러나 1908년 일제가 애국 사상의 온상인 사립학교를 탄압하기 위한 「사립학교령」을 발표하면서 예산 지방 사립학교 또한 일제의 탄압 정책과 공립화에 따른 학생 모집의 어려움, 재정의 부족, 공립학교 설립 등으로 폐교하게 되었다. 특히 지금의 예산향교에서 최규석[예산면장]이 한일합병 이후 대성학원을 세웠다가 1907년경 폐쇄하였다고 한다.

일제 수난기의 식민 교육은 한민족의 민족운동을 억압하는 수단의 하나로 민족교육을 통제하고 정치적인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간섭하면서 이른바 실용 교육을 강조하였는데, 다시 말하면 일본의 심부름 역할을 하는 우민화 교육이었다. 이 시기 초등교육기관인 보통학교와 심상소학교에 이어 1927년 6월 10일 예산읍 상공회의소에서 김영혁이 신명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일제는 ‘가능한 짧은 기간에 일본 사람 만들기’ 시책을 수립하고 1면 1학교 계획을 추진하여 보통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예산읍 지역에는 1911년 대흥공립보통학교[현 대흥초등학교], 1912년에 예산공립보통학교[현 예산초등학교]와 덕산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였다. 또한,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민족계 사학으로 김계선(金繼善)이 예산읍에 예동학교(禮東學校)를 설립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15년에 폐교되었다. 1939년에 신례원심상소학교[현 신례원초등학교], 1944년에 금오공립학교[현 금오초등학교]를 설립하였다. 고등보통학교인 예산공립농업학교는 1910년 7월 공주농림학교로 창립하였으며, 1911년 공주공립농업학교로 개칭하였다가, 1922년 4월 예산으로 이전하였으며, 1932년 예산공립농업학교[현 공주대학교 예산캠퍼스]로 개정하였다. 1941년 5월에는 예산공립실과여학교[현 예산여자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의의와 평가]

개항기나 일제강점기의 근대 교육은 예산군민의 기여로 이루어졌다. 학교를 설립하거나 운영할 때 지역민의 협조는 필연적이었고, 야학 등의 운영도 지역민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의 어려웠던 사회·경제적 상황에서도 예산군 지역민들의 교육에 대한 열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예산군의 근대 교육은 일제강점기하 교육 대상에서 소외되었던 한국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단순한 교육만이 아닌 민족교육 운동 형태로 시작되었다. 예산군민들에게 민족교육을 통하여 독립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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