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옹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1491
한자 和順翁主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표윤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2009년경 - 표윤명이 용궁리 주민에게 채록
관련 지명 용궁리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지도보기
관련 지명 김정희 선생 고택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8-1 지도보기
관련 지명 월성위 김한신 묘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지도보기
관련 지명 화순옹주 홍문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용궁리 799-2]지도보기
채록지 용궁리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지도보기
성격 설화
주요 등장 인물 월성위|화순옹주|사도세자|영조
모티프 유형 월성위 김한신 묘와 왕자지(王子池)에 얽힌 유적 유래담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전해지고 있는 화순옹주월성위 김한신 묘, 그리고 왕자지에 얽힌 이야기.

[개설]

「화순옹주」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화순옹주(和順翁主)[1720~1758]와 남편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1720~1758]의 묘에 얽혀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이다. 화순옹주월성위의 묘를 조성할 때 묘지 아래쪽에 왕자지(王子池)라는 연못이 조성되었는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고택 보수 사업을 하면서 메워 현재는 볼 수 없다.

[채록/수집 상황]

「화순옹주」예산군 신암면 김정희 선생 고택[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 주변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이며, 2009년경 표윤명이 용궁리 주민으로부터 채록하였다.

[내용]

영조 때 영의정인 김흥경(金興慶)[1677~1750]의 아들 김한신화순옹주와 혼인하여 월성위에 봉해졌다. 화순옹주는 원래 꼽추였다고 한다. 영조는 장애를 가진 옹주를 더욱 사랑하고 특별히 정성을 쏟았으며, 옹주에게 누구보다도 잘난 사내를 짝지어 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선택한 사람이 김한신이었다. 김한신은 영의정의 아들이자 총명하고 훤칠한 인물이었다.

화순옹주는 수(繡)에 능하여 아버지인 영조의 곤룡포를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어느 날 화순옹주가 곤룡포를 만들고 나서 품을 확인하기 위해 남편인 월성위로 하여금 입어 보게 하였다. 그런데 그때 처남인 사도세자가 지나다 곤룡포를 입은 월성위를 보고는 대노하였다. 임금만이 입는 곤룡포를 월성위가 입었으니 대역무도한 죄인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화가 난 사도세자는 옆에 있던 벼루를 들어 꿇어앉은 월성위를 그대로 내리쳤다. 이로 인해 월성위는 시름시름 앓다가 목숨을 잃게 되었다.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화순옹주는 남편의 억울함과 세자에 대한 원망으로 14일을 굶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영조는 사랑하는 옹주와 부마를 함께 잃은 슬픔에 정성을 다해 장사지내도록 명령하였다. 삼 정승으로 하여금 장례를 책임지고 치르게 하였고, 자리는 월성위가 애정을 쏟아부었던 용산(龍山) 앵무봉 아래로 정하였다. 이른바 3대 판서가 난다는 자리였다. 하지만 땅을 파고 보니 물이 콸콸 솟아올라 묘지로 마땅치 않았다.

화순옹주의 묘가 들어갈 자리를 물이 솟아오르는 곳으로 잡은 것을 알고 영조는 대노하였다. 반면 집안사람들은 3대 판서의 자리이니 꼭 그 자리에 묘를 써야 한다며 고집하였다. 당황한 삼 정승은 고심한 끝에 사람들에게 묘지 정면으로 약 200자[약 60m] 떨어진 아래쪽을 파라고 지시하였다. 묘지 아래쪽을 파니 묘지의 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물이 모인 쪽에는 연못을 조성하였다. 그렇게 해서 영조의 화는 가라앉았고 월성위화순옹주의 묘는 무사히 조성될 수 있었다. 이때 만들어진 연못은 왕자지라 하였는데, 지금은 도로가 생기며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모티프 분석]

「화순옹주」화순옹주월성위의 합장묘, 그리고 왕자지 조성 과정에 얽힌 유적 유래담이다.

[참고문헌]
  • 인터뷰(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주민, 남,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