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1524
한자 伽倻山溪谷-朝鮮王室遺蹟
이칭/별칭 가야산,왕실,태실,남연군,남연군묘,남연군비,흥녕군,명빈박씨,연령군,헌종,오페르트 도굴사건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지도보기|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일원에 집중되어 있는 조선 왕실의 태실과 묘소 등의 유적 개관.

[개설]

내포 지역을 상징하는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伽倻山) 일원에 있는 조선 왕실의 묘소와 태실 유적은 명빈박씨묘, 연령군묘, 남연군묘, 남연군 신도비, 헌종대왕 태실, 흥녕군묘 등으로 다양하며, 특히 남연군묘가야사지, 오페르트 도굴사건과 관련하여 상징적인 역사 유적이다.

[가야산과 조선 왕실 유적]

가야산은 흔히 불교와 불교 유적이 주목되나, 가야산 지역에는 조선 후기와 한말의 조선 왕실과 관련된 유적들도 많다. 가야산 주변인 덕산면 옥계리상가리 일원에 명빈박씨묘, 연령군묘, 남연군묘, 남연군 신도비, 헌종대왕 태실, 흥녕군묘 등 조선 왕실의 유적들이 있다. 조선 왕실 유적이 가야산에 자리 잡게 된 이유는 가야산 지역에 왕실 소유 토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왕실 소유 토지들은 개인들에게 팔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국가소유의 토지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남연군묘가 있는 곳은 흥선대원군의 후손이 소유자로 되어 있음은 이를 말해 준다.

[남연군묘 조성 일화]

가야산에서 가장 주목받았고, 잘 알려진 왕실 유적은 남연군의 묘[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이다. 남연군묘는 명당설과 오페르트 도굴사건, 도굴사건으로 인한 쇄국정책의 원인을 제공하였던 유적이다. 흔히 2명의 왕이 탄생한 풍수지리의 명당이라고 회자되고 있는 남연군묘와 관련된 일화는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전해진다. 이를 간략하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흥선군이 나이 18세 때 아버지 남연군이 돌아가셨다. 흥선군이 지사를 따라 덕산의 대덕사에 도착하자 지사는 한 고탑(古塔)을 가리키며 “저곳은 큰 길지이다. 그 귀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흥선군은 즉시 집으로 돌아가 재산을 모두 팔아 현금 2만 냥을 마련한 후, 그 절반을 대덕사의 주지에게 주어 절을 소각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 절이 모두 타 버리자 흥선군은 상여를 뫼시고 가서 재를 쓸고 그곳에 머물렀다.

한밤중에 흥선군의 형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각기 꿈 이야기를 하였다.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꾸짖기를, ‘나는 탑신(塔神)인데 너희들이 어찌 나의 사는 곳을 앗아가느냐? 만일 이곳에 장사를 하면 우제(虞祭)가 끝나기 전에 너희 4형제가 폭사할 것이니 속히 가거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3형제의 꿈이 모두 동일하였다. 이 말을 들은 흥선군은 분통을 터뜨리며 ‘과연 그렇다면 참으로 길지입니다. 운명이란 주관한 자가 따로 있는 것이니 신이 어찌 해를 끼치겠습니까? 그리고 종실(宗室)이 날로 몰락하여 우리 형제들이 옷자락을 끌고 날마다 장동 김문[壯金]의 문전을 찾아다니며 구차히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쾌하지 않겠습니까? 형님들은 모두 자식이 있지만 혈육 하나도 두지 못한 것은 저 혼자뿐이니 죽어도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형님들은 아무 말씀 마시고 계십시오.’라고 하였다.

흥선군이 이른 아침에 탑을 무너뜨리고 보니 탑 터가 모두 암석으로 되어 있었다. 도끼로 팠지만 도끼도 튀기만 하여, 흥선군은 도끼를 어깨에 메고 공중을 향하여 크게 꾸짖었다. 그런 후 다시 도끼질을 하자 다시 튀지 않고 암석이 잘 파졌다. 이렇게 하관을 한 후 혹 훗날 누가 옮길까 염려되어 수만 근의 철을 녹여 붓고 그 위에 사토(莎土)를 하였다. 그리고 흥선군은 승려를 데리고 경성으로 가던 중 수원의 대포진(大浦津)을 건널 무럽, 배에 탔던 승려가 갑자기 고함을 치며 불을 끄라고 말한 후 머리를 움켜쥐고 불에 탄 모습을 하더니 잠시 후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남연군의 묘가 복치형(伏稚形)이라고 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14년 만에 고종이 탄생하였다.”

이러한 일화가 구전되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하여 흥선대원군은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1844년 이장하였으며, 1885년 남연군 신도비를 세우고 남연군묘를 정비한다. 남연군 신도비남연군묘에서 약 700m 떨어진 초입에 세웠는데, 비문은 영의정 조두순이 썼다.

아울러 남연군묘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각 시설인 명덕사가 2014년도 발굴 조사에서 확인되는데, 명덕사 유적은 1965년까지도 사진자료에 건물과 담장 시설이 일부 남아 있었다. 남연군묘 인근에는 보덕사가 있다. 1871년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태운 미안함을 갚기 위해 인근에 보덕사를 건축하였다.

남연군묘와 관련된 유물로는 남은들 상여[국가민속문화재 제31호]가 있다. 남연군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옮기면서 사용한 상여가 남연군묘 주변 보호각에 전시되고 있다. 남은들 상여는 마지막 구간을 담당한 광천리 남은들 주민들이 남은 구간을 매우 극진히 모셨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상여를 마을에 주었다고 한다. 광천리의 보호각에 전시되어 있는 남은들 상여는 복제한 유물이며, 진품은 2006년 3월 국립고궁박물관에 기탁, 수장되어 있다.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남연군묘와 관련하여 조선 후기 쇄국정책의 빌미를 제공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고종이 왕이 된 이후 조선시대 후기는 외국 상인이 통상을 요구하는 시기였는데,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가 통상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덕산에 있는 남연군의 묘를 훼손한 사건이 벌어졌다.

19세기 후반에는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조선에 진출하고자 하였다. 독일인 오페르트도 조선과의 통상을 원했으나 1866년 두 번이나 통상 협상에 실패하였다. 그러자 오페르트는 병인사옥 때 탈출한 프랑스 신부 페롱(Feron)과 조선인 천주교도와 함께,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고 이를 이용하여 대원군과 통상을 제안하고자 하였다.

오페르트는 미국인 젠킨스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프랑스인 선교사, 조선인 천주교도들과 함께 1868년 5월 차이나호·그레타호 등 기선 두 척을 타고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출발하여 5월 10일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하여 아라사인이라 사칭하면서 남연군묘로 향하였다.

오페르트 일행은 덕산군청을 습격해 군기를 탈취하고, 민가로부터 발굴 도구를 약탈하여 남연군묘로 직행하여 밤에 도굴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남연군의 묘는 단단하게 석회칠이 되어 있어 쉽게 도굴하지 못했다. 밤새 도굴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채 날이 밝고 썰물 시간이 다가오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철수하였다.

오페르트는 프랑스 제독 알리망(Allemagne)[亞里莽]의 명의로 교섭을 요청하는 글을 흥선대원군에게 전해 달라 하였으나, 영종첨사 신효철(申孝哲)은 도굴의 만행을 규탄하고 양이(洋夷)와는 소통하지 않는다 하고 글을 돌려주었다.

오페르트남연군묘 도굴사건으로 젠킨스는 미국인에 의하여 고발당하였고, 페롱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소환당하였다. 우리나라는 조상숭배사상이 강하여 묘를 신성시하였는데, 더욱이 고종의 할아버지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자 흥선대원군이 크게 노하였다.

남연군묘 도굴 사건 이후 조선은 서양과의 교류에 더욱 배타적인 입장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당하고 이에 크게 분노한 흥선대원군은 서양 세력의 통상 요구를 단호히 거절함과 동시에 수교 거부의 입장을 밀어붙였다. 또한 오페르트 도굴사건으로 결국 대외적으로는 서양인의 위신이 떨어졌고, 대내적으로는 대원군의 쇄국양이 정책이 강화되었고 천주교에 대한 강력한 탄압 정책이 펼쳐져 천주교 박해가 강화되었다.

[헌종대왕 태실]

헌종대왕 태실가야산으로 가는 초입인 옥계리에 있다. 조선 24대 국왕 헌종(憲宗) 이환(李烉)은 익종(翼宗)으로 추존된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아들로 세자빈이었던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의 큰아들이고 23대 순조(純祖)의 손자이다. 1827년(순조 27) 2월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였으며, 1827년 7월 18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원손인 헌종이 태어났다. 1830년(순조 30) 5월 6일 효명세자가 사망하고, 1830년 9월 15일에 헌종이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헌종의 태를 장태하고 아기태실을 조성한 시기는 1827년 11월 11일이다. 이후 헌종이 임금으로 즉위된 후 아기태실에 화려한 석물이 치장되어 가봉된다. 태실 가봉일은 1847년(헌종 13) 3월 21일이다. 이는 헌종대왕 태실을 가봉하고 작성한 의궤인 『성상태실가봉석난간조배의궤(聖上胎室加封石欄干造排儀軌)』(1847)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며, 헌종 가봉태실이 그려진 『헌종태봉도』[1847]가 있어 그 구조를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

헌종대왕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경기도 고양 서삼릉으로 이전되고 태실은 파괴되었다. 서삼릉헌종 태실에는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헌종성황제태실(憲宗成皇帝胎室)[앞]~년오월(年五月) / 자충남예산군덕산면이봉(自忠南禮山郡德山面移봉)[뒤]’이라 하여 예산군에서 옮겨 왔음이 기록되어 있다. 2015년 가봉비의 파괴된 비신편 일부가 태봉산 밑 옥계저수지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옥계저수지에서 발견된 가봉비의 비신편에 완전하지 않지만 ‘…하태실(下胎室)[앞] … 월이십일일건(月二十一日建)[뒤]’과 같이 일부 명문이 확인되는데, 사료의 가봉 날짜와 일치한다. 가봉으로 인해 덕산(德山)이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었다. 예산군에서는 원위치인 태봉산 정상에서 몇몇 석물을 찾아 태실을 정비하였다.

[명빈박씨묘와 연령군묘, 흥녕군묘]

헌종태실 인근에 숙종의 후궁인 명빈박씨(榠嬪朴氏)와 아들인 연령군묘가 있고, 그 주변에 흥선대원군의 맏형인 흥녕군 이창응의 묘가 있다. 명빈박씨는 원래 상궁이었다가 숙종의 승은을 입은 지 10여 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년) 11월 4일 회임을 한 공으로 내명부 종4품 숙원에 책봉되어 후궁이 되었다. 1699년 연령군을 출산하고, 단종의 복위를 기념하여 종2품 숙의로 진봉되었다. 이어 1701년 음력 3월 23일 귀인에 올랐다가 1702년 음력 10월 18일 인원왕후의 왕비 책봉을 기념하여 정1품 빈의 자리에 올라 명빈(䄙嬪, 嫇嬪)이 되었다. 1703년(숙종 29) 음력 7월 15일 사망하여 음력 9월 17일 금천에 내명부 정1품의 예우로 예장되었다.

장사에 앞서 명빈박씨의 일가친척인 박동지가 관아에서 보낸 관을 짤 목재가 구차함을 호소하니 숙종이 해당 관원 및 아전까지 모두 체포하여 추문·나문토록 하고 기한 내에 관판을 구하지 못하면 사대부가에서 관판을 찾아내라는 명을 내렸다. 장례를 앞둔 음력 9월 3일, 숙종은 명빈의 초상에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고 방제에 아명을 넣을 수 없다는 이유로 관례를 깨고 5세인 명빈박씨의 외아들을 왕자군으로 책봉하여 연령군으로 삼고 [또는 ]의 명호를 주었다. 묘소는 경기도 금천현(衿川縣) 번당리(樊塘里)[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안장되었다. 1720년 연령군은 죽으면서, 자신이 어려서 어머니가 돌아가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 못하는 것을 슬퍼하며 어머니의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명빈박씨의 묘소 근처에 묻혔다. 1935년 명빈박씨의 묘는 경성부 구획정리 때 경성부 대방정에서 예산군 덕산면가야사터 근처에 아들 연령군의 묘와 함께 이장되었다. 연령군의 신도비는 예산으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가 1967년 공릉동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졌다.

연령군 이훤(李昍)은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의 여섯 아들 가운데 막내아들이다. 명빈박씨 소생이다. 연령군은 1699년 6월 13일 창경궁(昌慶宮) 집복헌(集福軒)에서 태어났다. 숙종은 1703년 9월 3일 명빈박씨 소생의 왕자를 봉작하도록 하였으며 9월 4일 연령군의 봉작 교지가 내려졌다. 예법에는 6세 이후 봉작하는 것이 관례이나 당시 생모인 명빈박씨의 상을 주관하게 하기 위해 봉작하였다. 상중에 봉작하는 것은 상복을 벗고 장복(章服)을 입어 의식을 행해야 하는데, 이는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반대 여론이 있었으나, 숙종은 받아들이지 않고 연령군의 봉작을 행하였다. 1707년(숙종 33) 2월 6일 저작(著作) 김동필(金東弼)의 딸과 가례를 올렸으며, 숙종은 연령군의 가례 때 백관에게 명하여 위요(圍繞)하도록 하였다. 연령군은 어린 나이에도 예를 행하는 모습에 부족한 점이 없이 하였다. 1719년(숙종 45) 10월 2일 2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시호를 효헌(孝憲)이라 하였다.

흥녕군은 장조의 서2남 은신군(恩信君)의 손자이며, 흥선대원군의 맏형이다. 아버지는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이고, 어머니는 군부인(郡夫人) 여흥민씨(驪興閔氏)로 1809년(순조9)에 태어났다. 1822년(순조 22) 12월 27일 휘경원수원관(守園官)을 지내고 같은 해 13세에 소의대부에 흥녕군에 봉작되었다. 이어 순조의 생모 수빈박씨의 묘를 관리하는 행 휘경원수(徽慶園守)에 임명되었다. 1828년(순조 28) 2월 1일 20세로 별세하였다. 사망 당시 부모인 남연군과 군부인 여흥민씨 내외는 아직 생존해 있었다. 관직은 승헌대부 흥녕군이었다. 아들이 없어 흥완군 이정응의 아들 이재원을 사후 양자로 입양하여 부인 임천조씨가 양육하였다고 한다.

흥녕군은 아버지 남연군보다 먼저 사망하여, 조카이자 양자인 이재원이 계동궁 사손직을 상속받게 된다. 조카인 고종 즉위 후 1864년(고종 1) 7월 9일 시호가 정간(貞簡)에 추증되었고, 1865년(고종 2) 9월 10일 증 이조판서 지종정경(知宗正卿)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이 특별 추증되었다. 다시 1865년 9월 14일 신정왕후 조대비의 명으로 특별히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종정경(議政府領議政兼領宗正卿)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시흥군 하북면 번대방리[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아버지 남연군의 묘가 경기도 연천군에서 예산군 덕산면 가야사터로 옮겨지자 1871년(고종 8) 8월 20일 아버지 남연군 묘소 근처인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로 이장되었다.

[조선시대 왕실 유적의 의의]

가야산 주변인 덕산면 옥계리상가리에는 조선 왕실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헌종대왕 태실, 명빈박씨묘, 연령군묘, 흥녕군묘, 남연군비남연군의 묘, 보덕사, 남은들 상여, 가야사지 등 왕실 유적과 관련을 맺고 있는 유적들이 있다.

헌종 태실덕산면덕산현에서 덕산군으로 승격된 사실이 있어 이를 지역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명빈박씨와 연령군의 애틋한 모자의 정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귀감이 되는 이야기이다. 이들 왕실유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적답사를 위한 위치 안내판도 일부만 설치되어 있다. 왕실유적에 대한 문화재 지정, 유적 정비와 답사코스 개발, 스토리텔링 소재 활용 등을 한다면 불교문화유산에 치우친 가야산에 대한 새로운 역사문화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 것이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